2022.04.23 15:24

롬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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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구 묵상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12:3)

 

분량은 많고 적음, 크고 작음을 뜻한다. 때문에 믿음의 분량대로라는 말을 단어에 대한 이해 그대로 적용하여 하나님이 주신 믿음에 양적인 차이가 있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많다.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에 크고 작음의 차이가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서 자연히 작은 믿음보다 큰 믿음의 신자가 되는 것에 관심을 두게 된다. 큰 믿음에 가치를 두면서 신자의 우월성 또한 큰 믿음에 의해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사실 인간에게는 믿음의 분량이 다르다는 말이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교회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행위에는 분명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의 분량도 다르게 느껴진다. 이런 이유로 목사의 믿음과 일반 교인의 믿음이 같다는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한다.

 

 

목사는 교인들을 가르치고 다스리며 구원으로 이끌어 갈 사역을 맡았기에 그 사역을 위해서 하나님이 큰 믿음을 주셨다고 생각한다. 구원을 위한 믿음은 같지만 사역을 위한 믿음은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에게 순종하지 않고 불만을 가지는 것을 평신도로서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분량을 넘어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는 것으로 적용하여 책망하기도 한다.

 

 

그런데 분량대로라는 말을 양적 개념으로 해석하게 되면 사람들을 곤란하게 하는 점이 있다. 하나님이 믿음의 분량을 작게 주셨으면 작은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다른 구절을 인용한다.

 

 

벧전 2:2절의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는 말과 엡 4:13절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는 등의 말을 접목하여 하나님이 각각 다른 분량으로 믿음을 주셨지만 그 믿음을 관리하여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가면 믿음의 분량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성경을 조잡하게 꿰어맞추는 해석이다. 이것은 성경 해석이라고 말할 가치도 없다. 그냥 마귀의 해석이다.

 

 

본문이 말하는 믿음의 분량은 양적 개념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양적으로 다르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구원을 위한 믿음은 같고 사역을 위한 믿음은 다르다는 말도 하지만 이것도 해석을 위한 구차한 조작일 뿐이다. 성경은 오직 하나의 믿음만 말하기 때문이다.

 

 

분량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용량이 아니라 척도. ‘측정하거나 평가하는 기준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평가되는 데 있어서 척도와 기준이 되는 것을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셨는데 그것이 믿음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이 있는 모든 신자는 그 믿음에 의해서 자신이 측정되고 평가되어야 한다. 이처럼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척도가 되어 자신을 평가한다는 생각을 품게 되는 것이 지혜다.

 

 

분량을 양적 의미로 해석하면서 큰 믿음을 가지면 어떤 고난과 어려움에서도 주를 배반하지 않고 인내하며 견디고 오히려 감사하는 능력을 나타낸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이것이 인간에게 가치를 두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배반하는 것이다. 믿음은 적은 능력이든 큰 능력이든 인간에게서 그 어떤 가치도 찾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에게서 믿음의 가치를 찾는 것이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에 있어서 모든 인간은 무능한 심판과 죽음의 존재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믿음이 척도와 기준으로 존재하는 신자의 지혜로운 생각이다.

 

 

믿음을 양적 개념으로 이해하면 반드시 차별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의 관계로 존재하는 교회는 기대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도 믿음의 분량을 말하면서 큰 믿음, 작은 믿음으로 나누고 사람이 큰 분량의 믿음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가짜 교회임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믿음이 척도가 되면 모든 사람은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무가치한 자로 주 앞에 서게 된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외일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은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주신 은혜가 아니면 로마 교회의 성도에게 복음을 말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바울이 복음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도 은혜 안에서 서로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믿음을 나눠주심으로 나타난 현상은 차별 없음이다. 믿음이 척도로 존재하는 신자에게는 다만 무가치한 심판의 존재에게 값없이 주어진 은혜만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바울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10:12)라고 말한다. 차별이 강조되고 차별이 넘치는 세상에서 차별을 지워버리는 은혜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 참된 믿음의 세계다. 이것이 믿음의 분량이라는 말에 담긴 온전한 뜻이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것이다.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온전할 수 없음을 알고 자신에게서 죄의 열매인 죽음을 보게 되며 그리스도의 피가 의가 되어 죽음에서 건짐 받았음을 믿는 것이다. 이 믿음은 우리를 심판의 존재로 드러내며 그리스도의 은혜에 온 시선을 두게 한다. 하나님의 주신 믿음에는 인간의 행함이 들어갈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의의 행함으로만 충만하다. 그래서 신자는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의로 부요하며 누구 하나 부족하지 않은 지체로 함께 한다.

 

 

믿음은 결코 인간을 높이지 않는다. 인간의 지혜는 가치 있는 것을 찾아 그것으로 자신을 확장하는 것에 몰두하지만 십자가로부터 나오는 참된 지혜는 자기를 부정하게 하며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것만 받아들이게 한다. 저주가 당연한 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베푸신 예수님의 용서가 구원이 되었음을 감사하는 관계에 차별이 없음을 사랑하게 한다. 이들은 자신의 믿음이 어떠한가? 에는 마음 두지 않는다. 믿음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셨음을 믿기 때문이다. 이것이 신자가 하나님이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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