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17 21:04

눅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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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18:8)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은 자기중심적인 인간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아담 안에서 태어난 인간의 생각과 발상은 자기중심적이라는 죄의 속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러한 속성은 성경 해석을 통해서도 드러나게 되는데 성경을 인간의 복과 구원과 평안을 위하여 교훈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하는 점이 그러하다.

 

 

이러한 생각으로 말씀을 대했던 유대인에게 예수님이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5:39)라고 하신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성경에서 찾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를 믿는 것이 참된 믿음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늘 믿음으로 인한 자기 이익을 생각한다. 자기에게 돌아올 이익을 확실하게 하고 좀 더 좋은 것으로 보장받기 위해 하나님이 인정하실만한 좋은 믿음이 되려고 힘을 쓰기도 한다. 예수님이 만족이 되는 믿음이 아니라 예수로 인한 구원과 함께 세상에서 가치 있는 영광도 함께 얻고자 하는 자기중심적 믿음에 취해있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에게 몰두해 있는 인간이 성경의 깊은 의미를 바르게 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성경 해석을 보면 그의 생각과 발상의 중심에 누가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오직 예수님과 십자가를 믿는 믿음에 의한 해석인지, 아니면 주의 영광으로 만족하지 못한 인간이 자기 영광을 위해 함부로 해석하는 것인지가 참된 믿음에서는 발견되는 것이다.

 

 

민주주의 원칙 중의 하나가 모든 일을 다수결로 결정하는 것이다. 어떤 문제에 대해 많은 사람의 의견이 더 옳은 것으로 결정되는 방식이다. 하지만 성경 해석에는 이러한 민주주의 원칙이 적용될 수 없다. 많은 사람이 같은 의미로 해석한다 해서 옳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이 A로 해석한다 해도 참된 믿음의 시각에서 아닌 것은 아니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내가 아닌 예수 편에 있는 것인데 예수 편에 있게 되면 세상과는 원수 관계가 된다. 세상이 옳고 바르다고 알고 있는 것을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을 넘어서 다른 복음을 따르는 저주받을 자로 선언하는 것이 믿음이기에 믿음과 믿음 아닌 것은 원수 관계가 되고 원한이 발생하게 된다.

 

 

, 세상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을 아니라고 선언하신 예수를 죽여 버린 원수 관계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 믿음이다. 과연 우리가 이러한 믿음의 사람인가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라는 말씀으로 묻는 것이 본문의 내용이다.

 

 

그렇다면 본문은 한국교회가 거의 같은 시각에서 해석하는 것처럼, 낙심하지 말고 힘써 기도할 것을 가르치는 내용이 아니다. 무엇보다 믿음은 낙심하지 않고 끈질기게 기도하여 하나님께 응답받게 하는 기술이 아니다. 그런데도 자기중심적인 믿음에 있는 자들은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라는 문구에 집착하여 믿음을 낙심하지 않는 기도를 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라는 옛말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과부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장을 번거롭게 한다고 할 정도로 찾아가는 것은 원수에 대한 원한 때문이다. 여기서 초점을 두어야 하는 것은 번거로울 정도로 찾아간 과부의 열심이 아니라 원수에 대한 원한을 풀어 줄 사람이 재판장밖에 없었던 과부의 현실이다.

 

 

만약 원한을 풀어 줄 다른 대상이 있다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장을 찾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과부에게는 원한을 해결할 유일한 희망이 재판장이었기 때문에 비록 무시 받는다고 해도 찾아가는 것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이것을 믿음으로 말씀하신다.

 

 

7절에서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택한 자들, 성도에게는 원한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십자가를 거부하는 세상과 원수의 관계가 되므로 발생하는 원한이다.

 

 

이 원한은 성도가 자기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다. 의지하고 힘을 구할 대상이 아무도 없는 과부처럼 성도는 세상에서 도움을 구할 자가 없다. 세상과 원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찾아갈 대상이 재판장밖에 없었던 과부처럼 성도에게는 찾아가고 의지할 대상이 다만 하나님 한 분뿐이다.

 

 

세상으로부터 외면받는 것이 성도에게 있는 원한이며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한 믿음이다. 과부가 재판장을 찾아가는 심정이 얼마나 절박했을까를 생각해보면 믿음은 우리를 절박한 심정이 되게 하여 하나님을 찾게 한다. 물론 세상일이 아니라 원한으로 인한 절박함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불의한 재판장에 빗대어 말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느끼는가를 생각하면 알 수 있다. 재판장이 과부가 찾아왔을 때 외면하고 무시한 것처럼 지금의 우리가 하나님께 마치 그러한 대접을 받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믿는데도 불구하고 삶은 힘들어지고 어려움에 부딪히는 현실에서 불의한 재판장 같이 느껴지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성도의 원한은 세상이 풀어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택한 자인 성도는 세상을 향하지 않는다. 비록 불의한 재판장 같이 느껴진다 해도 아들의 피로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만 의지할 뿐이다. 이것이 인자가 세상에 오셨을 때 보고자 하는 믿음이고 이 믿음을 택한 자에게 은총으로 주신 것이다. 이 믿음으로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하는 자로 사는 것이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않는 것이다.

 

 

 

성도가 믿음을 알게 되면 자신의 힘이 아니라 믿음의 능력이 살게 하는 현실에 눈을 뜬다. 자신이 아니라 주께서 믿음을 주셔서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면 낙심하지 않게 된다. 주가 일하시고 이루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비록 하나님께 무시 받는 것 같은 현실이라 해도 십자가에서 증거된 긍휼과 사랑의 하나님만 바라본다. 이것이 세상에 없는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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