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08 20:04

마 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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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6:34)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라는 말이 있다. 명작으로 유명한 고전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스칼렛 오하라의 마지막 대사다. 원작에는 ‘after all, tomorrow is another day’(결국, 내일은 다른 날이니까)로 되어 있는데 한국에서 상영되면서 다르게 번역되었다고 한다. 내일의 태양을 오늘과 다른 태양으로 해석하여 내일은 오늘과 다른 새로운 날이니 오늘 힘들다고 절망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라는 뜻으로 많이 이용된다.

 

 

물론 내일의 태양이 오늘의 태양과 다르지 않다. 태양은 같은 태양으로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뿐이고 지구가 스스로 회전하는 자전이란 것을 하면서 태양이 뜨고 지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 반복되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그것을 하루라고 하고 지금을 오늘, 그다음 날을 내일로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내일의 태양이 뜨는 것이 아니라 오늘 태양이 뜨는 것만 있다.

 

 

이것을 누가 모를까? 내일의 태양이 오늘 뜬 태양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늘의 어려움에 절망하기보다는 위로와 힘을 얻어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희망이 그러한 말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결국 현실과는 거리가 먼 막연한 기대에 의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한마디로 오늘보다 내일이 더 좋은 날이기를 바라는 인간의 공허한 희망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공허한 희망을 품고 성경을 보기 때문에 성경의 많은 구절이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이용된다.

 

 

인간이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은 평안한 삶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염려하고 걱정하며 산다. 오늘의 일로 염려하고 내일의 일을 예상하면서 염려한다. 심적 평안은 사라지고 잘못되면 어떡하나라는 불안감이 가득한 상태가 된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에서 수시로 겪는 마음 상태다. 그리고 염려와 걱정에서 벗어나고 불안 대신 평안의 마음이 되기 위해 하나님을 찾아 기도하는 것이 기독교인이다.

 

 

어려운 일에 대한 목사의 단골 멘트는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라라는 것이다. 내일의 모든 일까지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를 하고 염려하지 않는 것이 믿음이며 이 믿음으로 평안을 누리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5:7)라는 말도 빼놓지 않고 인용한다.

 

 

하지만 어떤 일에서도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근심 걱정 없이 평안을 누릴 사람이 있을지 의문이다. 염려가 물건처럼 여기에서 저기로 이동되는 것이 아닌데 하나님께 맡긴다고 해서 맡겨지는 것일까? 말은 맡긴다고 하면서 해결해달라고 기도하지만 그런 기도를 하는 것이 맡기지 못한 상태임을 보여준다. 진심으로 하나님께 맡겼다면 염려는 이미 나에게서 떠났기 때문에 해결해 달라는 기도가 필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슨 뜻으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는가?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라는 말처럼 하나님께서 오늘보다 좋은 내일을 주실 것이니까 염려하지 말고 희망을 가져라라는 뜻일까? 그런 뜻이라면 예수님 말씀 또한 공허하고 헛된 희망의 말로 인간을 위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일을 염려하는 우리가 하게 되는 것은 기도다. 염려로 인한 불안과 걱정을 기도를 통해서 해소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처럼 염려되는 일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하나님은 우리가 염려하는 일을 맡아 해결해주시는 분이 아니다. 오히려 내일 일을 염려하고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6:11)라는 기도와 맞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결국 내일 일의 염려로 인한 우리의 기도가 예수님의 기도를 훼방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내일 일의 염려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라는 육신의 문제로 연결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일의 육신의 일을 염려하여 기도하는 것을 이방인이 구하는 것으로 말씀하신 것이다(6:31-32). 이처럼 인간의 염려는 육신의 일이 자기의 뜻과 예상대로 되지 않음에 대한 불안감이다.

 

 

예수님은 내일을 오늘의 다음 날이란 뜻으로 말씀한 것이 아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6:30)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입히시고 먹이시는 날의 의미로 내일이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일하심으로 오늘이 있음을 믿는 믿음은 내일 역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바라보게 한다. 인간이 원하는 내일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내일이라는 뜻이다. 이런 뜻으로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라고 말씀한 것이다.

 

 

여기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라는 말이다. 이전 성경에는 내일 염려할 것이요로 되어 있지만 새번역 성경에도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로 번역되어 있다. ‘내일내일이는 뜻이 전혀 다르다. ‘내일 염려하라라는 말은 오늘은 염려하지 말고 다음 날 염려하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되지만 내일이라고 말하게 되면 날의 의미로 해석할 수 없다. 염려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 내일이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일이라는 시간, 날이 염려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내일이는 내일 자체를 의미하기 때문에 날이 아니라 존재로 해석해야 한다. 그렇다면 내일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모든 날의 주인이고 주관자이며 내일이 있게 하시는 하나님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내일을 위해 염려할 자격이 있는 분은 우리에게 내일을 주시는 하나님 한 분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인간이 내일을 염려하여 기도하는 것은 인간이 날의 주관자가 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것이 이방인의 기도임을 말씀하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좋지 않은 일이 있으면 내일로 연결하여 생각한다. 그래서 내일을 염려하게 된다. 오늘도 내일도 나를 위한 날로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날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하나님을 위한 날로 주어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는 것은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면 오늘의 괴로움을 없게 하여 평안의 내일을 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한 날의 괴로움도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주어진다는 뜻으로 이해할 내용이다.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부름을 받은 신자에게 나의 날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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