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29 12:03

롬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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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13:8)

 

복음을 모르면 율법이 나올 수밖에 없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라는 복음의 의미를 모르니 믿음을 율법으로 증명하고 확인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주일성수와 십일조는 물론이고 전도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까지 믿음의 증거로 제시하는 현대 교회의 신앙은 율법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본인들은 극구 부인한다. 율법을 강조하는 신앙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런데도 믿음과 행함은 하나라고 하면서 행함을 요구한다. 그 이유는 교회를 향한 욕망과 염려 때문이다. 교인의 행함 없이 교회는 발전할 수 없다. 그래서 믿음만 말하고 행함을 무시하는 것은 교인을 나태하게 만드는 위험한 생각이라고 반발하며 행함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러한 반발이 옳다면 먼저 성경 구절에 대한 답부터 제시해야 한다.

 

 

예수님은 율법을 완전하게 하려고 오셨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율법을 다 이루시고 완성하셨다. 완전하게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율법, 행함의 문제는 예수님에 의해서 완성된 것이다. 바울은 율법의 완성을 사랑으로 말한다. 그렇다면 이미 완성된 율법에 대해서 신자가 행해야 할 율법은 남아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해야 할까? 남아 있다고 하면 예수님의 완성을 믿지 않는 것이고, 남아 있지 않다면 우리의 어떤 행함도 믿음의 증거물로 제시되면 안 된다.

 

 

대개는 주일성수, 십일조, 전도 등등은 구약의 율법과 무관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주일은 구약의 안식일이 아니고, 십일조는 행하고 버리지 말아야 할 것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셨다는 핑계를 댄다. 그리고 전도는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 명령이기에 신자가 당연히 행해야 할 사명이지 율법이 아니라고 한다. 결국 무엇이 문제인가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율법적이라는 것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행위, 실천에 의미와 가치를 두는 것이다. 그래서 가치 있는 행위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믿음에 차별이 발생하는 것이 율법적 신앙이다. 사람이 무엇을 행한다 해도 그 모든 행함을 율법의 완성으로 나타난 예수님의 사랑 앞에서 쓰레기로 취급한다면 문제 될 것이 없다. 하지만 행함을 믿음으로 강조하고 가르치는 교회에서 여러분의 모든 행함은 쓰레기와 같습니다라는 말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모든 행함이 쓰레기와 같다면 바울은 어떤 의미에서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는 말을 하는 것일까? 사랑만큼은 실천해야 한다는 뜻인가?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울이 말하는 사랑과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이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해하는 이웃 사랑, 봉사, 구제를 실천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사랑이다. 바울은 사랑 하나로 율법이 다 이루어지고 완성되는 세상에 없는 예수님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사랑의 수준은 어려운 이웃에게 도움을 주고 베푸는 것이다. 재해를 당한 사람을 위해 기부를 하고, 직접 찾아가 봉사하거나 따뜻한 말로 위로하고 힘을 주면서 친절을 베푸는 정도다. 이런 사랑조차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데, 설령 실천한다 해도 이 정도의 사랑을 율법의 완성이라고 할 수 없다.

 

 

바울은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한다. 이것을 대개 신자는 예수님에게 사랑의 빚을 졌으니 그 빚을 이웃에게 갚으며 살아야 한다라는 뜻으로 이해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웃을 돕고 구제하는 것을 예수님에게 사랑을 빚진 자가 해야 할 일로 말하는 것이다.

 

 

신자가 빚진 사랑은 예수님의 사랑이다. 그리고 빚을 졌다는 것을 빚에 매인 것으로 생각하면 신자는 예수님의 사랑에 매인 자라는 뜻이 된다. 그 말은 곧 예수님께 빚진 그 사랑으로 남에게 갚아야 하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행할 능력이 없다. 우리의 힘으로 갚을 수 있는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답은 내가 빚진 예수님의 사랑을 그대로 남에게 전달하면 된다. 이것이 사랑의 빚진 자로 남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가 빚진 사랑은 우리 죄를 대신해 죽으심으로 죄를 용서하신 것이다. 이러한 사랑을 이웃을 돕고 구제를 실천하는 것으로 갚겠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에게 세상에 없는 보석을 받았는데 남에게는 가짜 보석으로 갚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예수님의 사랑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에게 베풀어졌다. 그렇다면 사랑의 빚진 자들은 모두 죄인의 자리에 있으며 남을 사랑하는 것도 죄인의 자리에서 행해진다. 강도를 돌봐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서 실천하는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이 베풀어진 죄인의 자리는 생각하지 않고 선한 의인으로 실천할 자기 사랑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적이 없고 사랑을 알지 못한 자다.

 

 

죄인의 자리에서 불쌍히 여김을 받았으면 남도 불쌍히 여겨야 한다. 그것이 사랑이다. 죄인 된 나를 정죄하지 않으신 것이 사랑이기에 나 또한 남을 정죄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자신의 선함으로 실천할 사랑으로 안다면 결국 무엇이든 이웃을 위해 행한 자기 일에 가치를 둔다. 이것이 죄인의 자리가 아닌 의의 자리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적이 없는 자의 흔적이다.

 

 

율법을 다 이룬 자가 의인이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 안에서 주를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 보시기에 의인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한다. 신자는 예수님의 사랑에만 매인 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 구절을 법적인 요소로 만들면 안 된다.

 

 

 

예를 들어 항상 기뻐하라는 구절을 항상 기뻐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라고 하는 것이 성경을 율법으로 조작해 행함의 문을 열고 자기의 의로 들어서는 것이며 율법의 완성인 사랑을 무시하는 것이 된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사랑에 매인 자이기에 그 십자가 사랑만 나타내고 전달하는 이들이 진심으로 사랑의 빚진 성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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