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05 11:55

롬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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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1:24)

 

기독교인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 중의 하나가 의문을 가지는 것과 질문하는 것이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은 세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세상은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 필요한 지식과 서로 함께 존재하는 사회 속에서 지켜야 할 질서와 사람의 도리 등 삶에 필요한 것을 가르친다.

 

 

하지만 교회는 근본적으로 영혼의 생명과 연결된 것을 가르친다. 따라서 세상의 가르침은 한시적인 인생에 필요한 것이지만 교회의 가르침은 영원한 생명을 좌우하기에 매우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로 다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교회의 기능과 역할이 아예 사라졌다고 할 정도로 세상과 구분되지 않은 내용들이 흘러나온다. 대표적인 것이 도덕과 복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교회의 가르침에 의문을 품지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의문도 질문도 없이 순종이 믿음이라는 맹목적인 자세만 유지하고 있는 기독교인의 자세가 답답하다.

 

 

특히 도덕적 설교가 참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포장되어 유포되는 것은 교회로서는 심각한 위기의 상태가 아닐 수 없다. ‘십일조 하면 복받는다는 말에는 그나마 의문과 함께 반감을 갖기도 하지만 도덕에 대해서만큼은 누구도 의문을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선한 분이시고 도덕은 선한 것이기 때문에 신자가 도덕적으로 바르게 사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의 삶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도덕적 삶의 실천을 강조하며 현대의 비도덕적인 모습을 질타하는 목사는 말씀을 바르게 전하는 목사로 칭송받는다.

 

 

분당의 유명한 교회의 이 모 목사가 오늘 본문으로 하는 설교를 들었다. 이 사람도 평소 도덕적 삶을 강조하는 설교에 일가견이 있는데 본문 역시 남녀 관계의 비도덕적인 현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풀어간다. ‘욕되게 하다라는 말을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존중하는 마음이 없이 탐욕의 대상으로만 다루는 행위로 해석하며 사람을 귀하게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성적 대상으로 삼아 자기 쾌락을 채우려고 하는 세상의 현실을 지적한다. 이천 년 전에 하나님이 예언하신 말씀이 오늘 이 시대에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결론은 성적으로 문란한 세상 풍조가 교회에 들어와 교회도 이성 간의 성적 문제가 많이 발생하는 현실이 되었으니 이것을 경계하고 몸을 서로 욕되게 하지 않는 것이 믿음이며 말씀을 따르는 신자의 바른 삶이라는 것이다. 도대체 구약성경은 보지 않은 것인가?

 

 

이러한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달되고 받아들여지는 교회 현실은 한마디로 기독교의 본질인 십자가에 대한 이해가 없이 세상이 선의 기준으로 제시한 도덕과 윤리에 매달린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에 의문을 가져본다면, 하나님은 인간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심으로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다. 그런데 목사가 이것을 금지할 행동으로 말하는 것이 옳은가? 하나님이 내버려 두신 일을 목사가 신자로서 옳지 않은 행동으로 말하며 간섭하는 것은 분명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이런 의문에 도덕은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1:26,27절을 보면 동성애도 부끄러운 욕심으로 행하는 부끄러운 일로 말하면서 그 또한 하나님이 내버려 두신 것으로 말한다. 그리고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인간을 상실한 마음 그대로 내버려 두심으로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본문에서 주지해야 하는 것은 내버려 두신 하나님의 뜻이다. 인간이 존재하는 세상이 성적으로 문란하고 롬 1:29-31절에서 말한 죄로 가득하다면 그러한 죄의 유혹을 이기고 바른 삶을 살도록 가르칠 것이 아니라 먼저 그냥 죄 가운데서 살도록 내버려 두신 하나님의 일에 의문을 품는 것이 옳다.

 

 

그리고 본문을 성적으로 문란해지는 것을 경계해야 하는 지침서처럼 말하는 목사에게 그것이 옳지 않은 행동이라면 하나님은 왜 내버려 두신 것입니까?’라고 질문해야 한다. 그런데도 의문과 질문이 없는 것은 십자가 복음에 대한 이해가 없이 도덕이 들어가는 설교를 무조건 옳은 것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무지함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1:32절에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라고 말한다.

 

 

사형을 집행할 권한은 하나님께 있다. 따라서 자신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인임을 안다면 하나님은 나에게 사형, 즉 심판하시는 분이 된다. 비록 도덕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삶을 산다 해도 사형에 해당하는 죄인일 뿐이고 하나님께 복을 구할 자격이 없다는 시각으로 자신을 보게 되는 것이다.

 

 

자신을 이러한 시각으로 보게 되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나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게 된다. 오로지 사형에 해당하는 자에게 주어진 구원 안에서 자기 자랑은 사라지고 십자가 은혜로만 감사하는 신자로 만들기 위해 사형에 해당한다는 심판을 통과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신앙이 도덕으로 변질하면 도덕적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을 바른 믿음의 신자로 여길 것이고 당연히 자신이 사형에 해당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 건전한 교회를 다니면서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지극히 바른 신자로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 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신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을 도덕 안에서는 알 수가 없다.

 

 

 

도덕적 삶을 말씀을 따르는 삶으로 생각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이다. 비도덕적으로 살아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도덕으로도 사형에 해당하는 심판을 피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도덕적인 삶도 결국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일 뿐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기 선함을 따라 도덕적으로 살도록 내버려 두신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이다. 도덕에 빠뜨려 십자가 사랑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사탄의 유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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