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12 11:39

엡 2:3

조회 수 126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2:3)

 

성경이 인간에 대해 일관성 있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 대상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인간 상태를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말한다. 본질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지는 천성적인 것을 말한다. 생겨 먹은 것이 하나님의 진노 대상이라는 것이다. 진노로 심판을 받아야 할 죄인이 본질이며 이것은 결코 변하지도 개선되지도 않는다. 시작도 마지막도 죄로 인한 진노의 자녀다.

 

 

이것을 전제로 하면 가장 먼저 교회가 가르치는 성화 개념에 오류가 발생한다. 믿기 전과 믿은 후의 삶이 달라야 하고 믿음 생활이 계속될수록 삶은 점차 개선되고 변화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성화 개념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바울의 선언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들, 즉 소위 성경 전문가로 자처하는 이들은 전에는이라는 단어로 이 문제를 해결한다. 바울이 개종하기 이전 상태를 진술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즉 예수를 믿기 전에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과 똑같이 진노의 자녀였지만 예수를 만나고 믿게 된 후는 진노의 자녀가 아닌 것으로 말한다. 따라서 믿음 이후에는 믿음 이전의 악한 삶과 성품이 변화된 성화로 믿음이 증거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 전체에 집중하지 않은 산만한 해석일 뿐이다.

 

 

다른 무엇보다 본문 한 구절에만 집중해도 성화의 오류는 드러난다. 진노의 자녀가 믿음 이전 상태를 의미한다면, 믿음 이후는 육체의 욕심을 따르고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는 인간 본질의 상태에서 반드시 벗어나야 한다는 조건이 발생한다. 하지만 누구도 이러한 성화를 이룰 수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성화 개념의 오류다.

 

 

예수님은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15:18)라고 말씀하셨고, 14:3절에서는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말씀하고, 바울도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3:12)라고 말한다.

 

 

이것이 인간에 대한 성경의 일관성 있는 증거이기에 믿음의 능력을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으로 변하게 하는 성화로 주장하려면 이러한 내용과 충돌되지 않는 해석이 전제되어야 한다. 분명한 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믿음 이전과 이후, 또는 중생 이전과 이후의 삶의 변화로 구분하는 것은 자승자박(自繩自縛)의 오류를 범하는 것일 뿐이다. 육체의 욕심을 따르지 않고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대로 하지 않는 수준의 변화를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바울은 어떤 뜻으로 전에는이라는 말을 하는 것일까? 이것은 엡 2:4~6절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전에는 허물과 죄로 죽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것이 전부인데, 그런 우리에게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크신 사랑으로 허물로 죽은 자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서 은혜로 구원을 받게 한 자가 된 것이다.

 

 

주의할 것은 진노의 자녀라는 인간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다만 죄와 허물로 죽은 진노의 자녀일 뿐인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신 은혜를 입었다는 것이 다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밖에 있는 진노의 자녀가 전에는에 해당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진노의 자녀가 후에는에 해당하는 것이다.

 

 

가령 바퀴벌레를 더러운 벌레로 간주하여 바다에 던졌다고 하자. 바다에 던져진 바퀴벌레는 죽음이라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상태고 운명이다. 그런 바퀴벌레를 병에 넣어서 바다에 던져진 것이 사랑으로 인하여 살리심을 받은 바퀴벌레의 바뀐 운명으로 생각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바퀴벌레는 바퀴벌레일 뿐이라는 것이다. 병 안에 넣었다고 해서 밤에 활동하고 어두운 곳을 좋아하는 습성이 달라지지 않는다. 만약 병에서 나온다면 여전히 자기 습성을 따라 어두운 곳을 찾게 된다. 따라서 바퀴벌레에게 베풀어진 사랑과 은혜는 병 안에 두는 것이지 바퀴벌레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바퀴벌레가 변화되게 하면 안 되는가? 더러운 바퀴벌레가 습성이 변하는 성화를 이루어 깨끗하게 되면 안 되는가? 이것이 악하고 더러운 인간이 추구하는 믿음이지만 하나님의 뜻은 아니다.

 

 

바울은 엡 2:7절에서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뜻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 베풀어진 은혜의 풍성함을 세상에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 상태 그대로 존재하게 한다. 자신을 도무지 변할 수 없는 진노의 자녀로 보게 될 때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신 사랑과 은혜를 찬송하고 감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든 밖에 있든 진노의 자녀라는 인간의 본질은 다르지 않고 달라지지도 않는다. 다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다라는 선언의 이유가 될 뿐이다. 병 안에 있는 바퀴벌레에게 필요하고 중요한 것은 자신이 산 것은 병 안에 있기 때문이고 병 안에 집어넣은 은혜와 사랑을 아는 것이다. 이것이 같은 바퀴벌레이지만 병 안에 있는 것과 밖에 있는 것의 다른 점이다.

 

 

성경이 이처럼 인간을 시작과 마지막까지 일관성 있게 선을 행할 수 없는 죄인으로 선언하는 것은 진노의 자녀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신 사랑과 은혜를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기 위해서다. 따라서 자신을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알게 되고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이 목적하신 여호와를 경외하는 성도다.

 

 

 

그런 점에서 인간이 훌륭해지고 가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에 뜻을 둔 성화는 더러운 본성에서 나오는 탐욕일 뿐이다. 또한 이러한 성화를 부정한다고 해서 탐욕에서 벗어난 신자 되는 것도 아니다. 바퀴벌레는 바퀴벌레일 뿐이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96 롬 13:1 신윤식 2023.12.16 109
95 창 11:9 신윤식 2023.12.09 118
94 계 14:3 신윤식 2023.12.02 116
93 계 20:6 신윤식 2023.11.25 112
92 벧후 3:10 신윤식 2023.11.18 115
91 눅 17:21 신윤식 2023.11.11 124
90 마 24:14 신윤식 2023.11.04 103
89 약 1:25 신윤식 2023.10.28 113
88 삼상 16:14 신윤식 2023.10.21 115
87 약 1:12 신윤식 2023.10.14 119
86 마 23:23 신윤식 2023.10.07 122
85 욥 22:21 신윤식 2023.09.30 141
84 욥 23:10 신윤식 2023.09.16 135
83 요 3:16 신윤식 2023.09.09 122
82 호 10:12 신윤식 2023.08.26 123
81 딤전 3:2 신윤식 2023.08.19 126
» 엡 2:3 신윤식 2023.08.12 126
79 롬 1:24 신윤식 2023.08.05 138
78 롬 13:8 신윤식 2023.07.29 128
77 시 126:5 신윤식 2023.07.22 107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Next
/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