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16 10:42

욥 23:10

조회 수 135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23:10)

 

우리는 욥을 견딜 수 없는 시련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인내한 사람으로 평가한다. 특히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는 말은 욥의 아주 멋진 신앙고백으로 알고 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자가 시련 가운데서도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는 긍정적인 소망의 말로 이해하는 것이다.

 

 

욥은 자신이 겪는 시련의 상황을 하나님의 단련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단련의 이유와 목적은 자신을 정금 같은 존재로 만들기 위한 것으로 말한다. 우리는 욥의 이러한 고백을 바탕으로 믿는 자의 시련을 정금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려는 하나님의 단련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목사가 평소에는 하나님을 믿는 자를 세상의 성공이라는 복 된 길로 인도하시는 분으로 말하다가 시련을 겪는 사람에게는 당신을 정금 같이 나오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단련입니다라는 말로 위로 아닌 위로를 하는 것이다.

 

 

정금은 불순물이 없는 순수 상태의 금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과연 이런 상태가 될 수 있는지부터 따져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정금 같은 상태의 인간이 필요한지도 따져야 한다. 먼저 정금 같은 인간은 없다.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사람 누구도 정금 같다는 평가를 받을 수 없다.

 

 

또한 하나님께는 정금 같은 인간이 필요하지도 않다. 만약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는 일에 정금 같은 인간이 필요했다면 처음부터 인간을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지켰어야 한다.

 

 

예레미야는 인간의 마음을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으로 말한다. 그런데 부패한 마음이 우리가 시련을 겪는 것으로 정화되어 정금 같이 될 수 있다면 구원은 십자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단련이라는 방식으로도 이루어진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이미 부패한 마음은 어떤 방법으로든 정금 같은 상태로 되돌릴 수 없다. 따라서 욥의 말은 우리가 이해하는 것처럼 믿음의 신앙고백으로 해석할 문제가 아니다.

 

 

욥은 세 친구와 격렬한 논쟁을 하고 있다. 세 친구는 시련을 욥의 죄와 연결하여 충고를 한다. 반면에 욥은 시련이 죄로 인한 것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에게는 엄청난 시련을 받아야 할 만한 죄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욥의 혼란이며 괴로움이다. 그래서 욥은 시련을 자신이 가는 길을 아시는 하나님이 자기를 단련하여 정금 같이 나오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일로 말함으로써 죄로 인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려는 의도로 이해할 수 있다.

 

 

만약 욥의 말처럼 시련이 하나님의 단련이라면 욥은 정금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행하신 단련이라면 실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시련이 끝난 욥에게 정금 같은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과연 그러한 모습이 있는가? 욥기는 시련이 끝난 욥에게 하나님이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시고 욥은 늙어 나이가 차서 죽은 것으로 끝난다. 정금 같이 된 욥은 없다. 즉 우리를 정금 같이 되게 하려는 하나님의 단련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욥의 말이 위로가 된다고 한다. 세상을 살면서 겪는 아픔과 고통의 일들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현재보다 더 나은 인간이 되게 하려는 하나님의 처우로 해석하는 것이 절망의 상황에서 그나마 위로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항상 이러한 의도로 성경을 보기 때문에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8:7)라는 빌닷의 말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무지한 사태가 발생한다.

 

 

욥의 말에서 나타나는 욥의 문제는 친구들 앞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수호하고자 하는 것이다. 자기의 시련이 죄와 무관하다는 것을 주장함으로써 죄인으로 드러나는 것을 거부하고, 시련을 자기의 길을 아시는 하나님이 자신을 정금 같이 나오게 하려는 하나님의 단련으로 말함으로써 시련의 가치와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것이 그것이다.

 

 

시련의 결과가 정금 같이 되는 것이라면 결국 시련이 없는 친구들보다 더 가치 있는 자가 된다는 의미가 된다. 이것을 생각하면 욥이 어떤 의도로 본문의 말을 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믿음의 신앙고백이 아니라 자기를 향한 인간의 포부와 뜻이 담긴 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가치 있는 자로 평가될 수 없다. 욥은 이것을 몰랐다. 욥기에서 욥은 동방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로 인정받는 가치 있는 인간으로 시작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이 아님을 사탄이 욥을 치게 하여 보이신다. 하나님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는 인간을 원하시는데 욥은 여기에 무지했던 것이다. 물론 욥이 몰랐던 내용을 지금의 인간도 모른다. 그래서 빌닷의 말이나 욥의 말을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말로 곡해하는 것이다.

 

 

욥은 마지막에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자신을 티끌과 재와 같은 존재로 바라보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욥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티끌과 재처럼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알지 못하고 자기 가치를 지키고자 했던 것을 회개한 것이다. 이것이 욥에게 이루어진 시련의 결과물이다.

 

 

정금 같은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정금 같이 만들어서 예수 안에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티끌과 재와 같은 아무것도 아닌 쓸모없는 자임을 깨닫게 하셔서 예수 안에 있게 하신다. 그리고 예수님의 거룩한 피의 은혜 안에서 흠 없는 하나님의 자녀로 여기신다. 이것이 십자가 복음이다.

 

 

그래도 하나님이 우리를 단련하여 정금 같이 나오게 하신다는 것을 믿겠다면 진심으로 욥과 같은 시련을 받으면서라도 정금 같이 되고 싶습니까?’라는 질문을 하고 싶다. 단언컨대 이것은 인간의 본심이 아니다. 그저 위로와 은혜가 되는 말이기에 붙들려는 것뿐이다.

 

 

 

인간은 존재 가치가 없다. 존재해봐야 하나님께는 한탄의 대상일 뿐이다. 그런 우리를 존재하게 하시는 것은 십자가에서 이루신 예수님의 피의 존귀함과 사랑의 가치를 세상에 나타내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쓸모없는 자로 드러나도록 인도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단련이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96 롬 13:1 신윤식 2023.12.16 108
95 창 11:9 신윤식 2023.12.09 117
94 계 14:3 신윤식 2023.12.02 115
93 계 20:6 신윤식 2023.11.25 111
92 벧후 3:10 신윤식 2023.11.18 114
91 눅 17:21 신윤식 2023.11.11 124
90 마 24:14 신윤식 2023.11.04 103
89 약 1:25 신윤식 2023.10.28 113
88 삼상 16:14 신윤식 2023.10.21 115
87 약 1:12 신윤식 2023.10.14 119
86 마 23:23 신윤식 2023.10.07 122
85 욥 22:21 신윤식 2023.09.30 141
» 욥 23:10 신윤식 2023.09.16 135
83 요 3:16 신윤식 2023.09.09 122
82 호 10:12 신윤식 2023.08.26 123
81 딤전 3:2 신윤식 2023.08.19 126
80 엡 2:3 신윤식 2023.08.12 126
79 롬 1:24 신윤식 2023.08.05 138
78 롬 13:8 신윤식 2023.07.29 128
77 시 126:5 신윤식 2023.07.22 107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Next
/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