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30 11:30

욥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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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22:21)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고 이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바울은 인간이 진노의 자녀로 행한 증거를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는 것으로 말한다(2:3).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세상의 도덕적 원칙과 질서에서 심하게 어긋난 악한 행위가 아니라 모든 인간이 본성적으로 자연스럽게 행하고 생활하는 것이 진노의 자녀 된 증거라는 것에 염두를 두어야 한다.

 

 

어떤 인간도 자기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본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비록 그가 세상이 복으로 인정하는 평안과 형통의 삶을 누린다 해도 하나님에 대해서는 진노의 자녀에 해당하는 본성으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세상이 말하는 복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판단할 근거가 될 수 없다. 이것이 엘리바스가 욥에게 한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면 너에게 복이 임한다라는 말에서 드러난 오류다.

 

 

엘리바스는 자신의 현재가 욥과 다르게 평안한 이유를 하나님과의 화목에 두고 있다. 이러한 엘리바스의 시각이 하나님을 찾고 부르는 기독교인과 다르지 않다. 여호와께서 엘리바스에게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42:7)라고 말씀하셨는데도 교회 안에서는 마치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오해되어 전해지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이루고 싶어 한다. 하나님과 화목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좋은 것을 받을 수 있고 죽은 후에는 천국에 가게 된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반대로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하여 미움받는 관계가 되면 평안과 복 대신에 벌을 받고 구원의 여부도 불확실해진다는 불안감이 있기에 하나님과 친한 관계가 되는 화목에 마음을 두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준으로 욥의 재앙을 판단하면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힌다. 욥기는 욥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 그리고 재물에도 부요하고 동방에서 가장 훌륭한 자라는 칭송과 함께 시작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엘리바스가 말하는 하나님과의 화목과 평안과 복이 임한 상태의 욥으로 시작한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과 화목했던 관계가 죄로 인해 깨어졌다고 하면 된다. 욥의 친구들은 이러한 시각에서 욥에게 죄를 회개할 것을 충고한다. 하지만 그것도 드러난 상황과 형편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판단하는 인간의 어리석은 시각일 뿐이다. 욥기는 욥의 행위를 항상 하나님께 범죄 하지 않기 위해 힘썼던 자로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교회도 하나님과 친해지는 법’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법등의 제목으로 전해지는 설교들이 많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해 인간이 실천해야 할 항목들을 제시하지만 한마디로 말한다면 인간을 유혹했던 사탄의 거짓말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이러한 거짓말이 사람들에게 통하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과 믿음과 인간에 대해서 같은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과 화목해질 수 없다. 이웃과도 화목하지 못하면서 하나님과 화목하겠다고 나서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이웃과의 관계가 좋을 때는 화목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조금이라도 나를 불편하게 하고 해를 끼치면 화목은 없다. 화목하다가 깨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나 아닌 타인과 화목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이 자기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진노의 자녀로서의 성품이다.

 

 

욥과 대화할 때 엘리바스는 하나님께 불만이 없었을 것이다. 이유는 욥에 비해 평안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욥에게 재앙이 없고 부와 믿음이 훌륭하다는 칭송을 받는 상태에서 욥을 만난다 해도 불만이 없었을까? 욥이 자신에 비해 더 많은 것을 누리는 것에서 자신과 욥을 비교하며 상대적으로 부족한 현실에 불만이 있을 수 있다.

 

 

우리 역시 이웃과의 관계에서 이러한 태도를 보인다. 그것은 하나님과 화목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자기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것이며 이러한 본성을 버릴 수 없는 인간으로는 결코 하나님과 화목할 수가 없다. 엘리바스에게는 이러한 인간에 관한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 인간이 무슨 수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될 수 있을까?’ 도무지 이런 의문이 없다. 어쩌면 진노의 자녀는 성도가 되기 전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성도가 된 후는 진노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화목해질 수 있고 화목해지기 위해 힘써야 한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바울은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고 말한다(5:10). 하나님과의 화목은 오직 아들의 죽으심으로만 된다는 뜻이며 아들의 죽으심으로 화목의 관계는 이미 이루어졌기에 성도가 화목을 위해 해야 할 것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5:11)라고 말한다.

 

 

예수 안에서 인간은 무기력한 존재다. 따라서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항상 자신의 무기력함을 인지하고 경험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성도를 이끄시는 현실이다. 항상 육체의 욕심을 따르는 현실로 드러나게 하시고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는 진노의 자녀임을 깨닫게 하신다. 그렇게 인간의 모든 것을 가치 없는 것으로 만드신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기쁨이 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과의 화목이다.

 

 

자기 본질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전에 자신이 어떤 본성으로 존재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을 수 없고 화목할 수도 없는 진노의 자녀로 행하는 자신에 대해 눈이 열려야 한다.

 

 

 

믿음으로 행한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거짓이고 위선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으심 앞에서 주의 피로 이루신 일만 자랑하고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화목이다. 이 화목을 위해 우리를 진노의 자녀로 드러나게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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