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07 12:21

마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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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3:23)

 

목사라면 누구나 예수를 믿으라고 말한다. 그것도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믿을 것을 강조한다. 예수를 믿어야 복을 받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현대 기독교의 기본으로 뿌리 깊이 박혀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16:31)라고 외쳤으니 목사가 예수를 믿으라라고 말하는 것은 당연지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말에 담긴 의도를 아는 것이다. 그 의도는 말하는 이와 같은 믿음, 같은 생각이어야 알 수 있다. 만약 믿음과 생각이 다르다면 말하는 이의 의도는 무시되고 자기 생각을 따라 제멋대로 해석하는 것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바울은 믿음에 있어서 인간의 능력을 인정한 적이 없다. 죄인 된 인간에게는 예수를 믿을 가능성이 없음을 일관되게 증거한 것이 바울의 복음이다. 예수조차 바르게 알 수 없는 무능한 존재가 인간에 대한 바울의 이해다. 이러한 바울을 안다면 주 예수를 믿으라라는 말을 구원받으려면 예수 믿을 것을 가르치는 의미로 곡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을 안다고 가정해보자. 과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죄인 된 우리에게 오셔서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이 현대 교회가 믿음의 행위로 강조하는 십일조를 버리지 않고 행해야 할 것으로 말씀하실까?

 

 

예수님은 바리새인이 안식일을 율법적으로 지키는 것을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 잘못된 것으로 책망하셨다. 그리고 안식일을 버리지 말아야 할 것으로 말씀하신 적도 없다. 그런데 유독 십일조를 버리지 말아야 할 것으로 말씀하신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현대 교회가 말하는 십일조를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한마디로 돈이다. 십일조의 본질, 즉 십일조에 담긴 믿음의 의미에는 관심 두지 않고 돈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어떻게든 십일조라는 형식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어떤 구실을 붙여서라도 믿음의 행함으로 연결하여 실천을 강요하는 것이다.

 

 

십일조는 구약에 등장하는 규례다. 그리고 구약에는 십일조 외에 수많은 규례가 있다. 하지만 모든 규례를 지금의 교회가 지킬 수 없기에 예수님의 오심으로 율법이 완성되었다고 하면서 구약의 규례에서 벗어난다. 그런데도 안식일, 즉 주일과 십일조는 포기하지 않는다. 이유는 돈, 교회의 재정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안식일과 십일조를 신약으로 끌어오는 데 필요한 것은 성경적 근거인데 그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성경을 왜곡한다. 안식일은 부활 후 첫날, 주일로 바뀌었고 십일조는 예수님이 버리지 말라고 말씀하셨으니 그대로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과연 예수님이 그런 의도로 본문의 말씀을 하셨을까?

 

 

신약에는 십일조가 없다고 말하는 목사들도 있다. 이들은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라는 말씀을 버리지 말고 행하라는 명령형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에게 그렇게 행했어야 했다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율법을 지킨다며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십일조 율법을 바르게 지키려면 물질의 십일조만 드릴 것이 아니라 율법에서 더욱 중요한 정의와 긍휼과 믿음도 버리지 말고 다 지켜 행했어야 했다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일조를 버리지 말라고 말씀한 적이 없기에 신약에 십일조는 없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해석하면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버리지 않은 바른 십일조를 행하라는 뜻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십일조를 하되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행한 바리새인을 본받지 말고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 살아있는 바른 십일조를 행해야 한다는 말로 변질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말 또한 인간은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버리지 않는 십일조를 행할 수 없다는 점에서 예수님의 의도에서 벗어난 해석이 아닐 수 없다.

 

 

본문 해석에서 중요한 것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지니라라는 말씀의 바른 의미를 찾는 것이다. ‘이것도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말한다. 즉 십일조라는 율법보다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저것도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말한다. 그렇다면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라는 말은 분명 바리새인이 행하여 왔고 지금의 교회가 행하고 있는 십일조도 버리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것처럼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이 유독 십일조 하나만 버리지 말고 지켜 행해야 할 것으로 남겨 두실 이유가 없음을 생각하면 십일조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라는 해석은 십자가와 부딪힌다.

 

 

문제는 번역의 오류에 있다.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라는 헬라어 문구가 잘못 번역된 것이다. ‘버리지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피에미(ἀφίημι)이고 그 뜻은 버려두다, 용서하다이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6:14)라는 말씀에서 용서가 헬라어 아피에미이다.

 

 

이외에도 아피에미는 용서의 뜻으로 사용된다. 그렇다면 저것도 버리지 말지니라라는 말씀은 십일조를 버리지 말고 행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로 드러난 너희의 죄를 버려두지 말라, 용서하지 말라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십일조를 포함하여 율법은 인간의 의를 세우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은 십일조와 율법을 행하면서 자기 의를 세운다. 율법의 중한 것은 죄를 깨닫고, 십자가로 완성된 의와 긍휼과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인데 이것을 버린 것이다. 이것이 바리새인을 향한 예수님의 책망이며 그러한 죄를 용서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즉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해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버리는 인간의 완악함을 책망하신 것이다.

 

 

이러한 말씀을 버리지 말지니라로 번역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피에미의 의미를 몰랐거나 아니면 그 의미를 알았다 해도 정직하게 번역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 드린 것을 용서하지 말라는 것은 현대 교회가 하나님께 바친다고 하는 십일조의 죄를 용서하지 말라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하긴 교회의 주특기가 성경을 무시하는 것이니 용서하지 말라라고 정직하게 번역했다 해도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말이다. 그래서 성경을 볼 때는 그 의도에 집중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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