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28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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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1:25)

 

기독교인은 말만 있고 실천이 없다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교회에서는 이웃을 사랑하며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는 것을 믿음의 실천으로 가르치는데 정작 삶은 이기적이고 도덕적이지 않은 것에 대한 비난일 것이다.

 

 

여기에는 언론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교회의 문제와 목사의 비도덕적인 일탈도 한몫한다. 사실 교회를 가리키는 개신교개독교’(개 같은 기독교, 개념을 밥에 말아 먹은 기독교)라는 별칭으로 부르며 조롱하기까지 하는 현실에서 할 말은 별로 없다.

 

 

이러한 현실에서 목사는 교회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하고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있다며 바른 삶의 실천이 따르는 믿음을 참된 믿음으로 강조한다. 그리고 세상이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헌금 문제와 목사의 권한 등 여러 가지 제도에 대해 소위 개혁적인 태도로 바른 교회를 구축하려고 노력한다.

 

 

또한 기독교인 개인도 믿음과 일치하는 삶의 실천을 위해 고민하고 노력하기도 한다. 이러한 노력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으로 정당화하기에는 야고보서가 가장 효과적이다. 믿음과 함께 행함을 가르치고 강조하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22)라고 말한다. 듣기만 하고 행함이 없는 것은 자기를 속이는 것이라는 말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인 누구나 자신이 말씀을 듣는 것으로 그친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목사가 교인들에게 설교를 듣기만 하지 말고 행하라고 다그치기에 좋은 구실이 되는 내용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야고보서의 말을 그런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과연 옳을까? 율법의 본질과 행함의 의미를 아는 신자라면 현대 교회가 가르치는 행함은 야고보의 뜻을 왜곡한 불편한 말로 다가오게 된다. 물론 교회가 행함만 강조하고 믿음을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니다.

 

 

구원의 능력이 행함이 아니라 믿음에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야고보의 말을 근거로 행함이 있는 믿음을 바른 믿음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문제는 행함에 대한 이해가 야고보의 생각과 다르다면 결국 진리로서의 가치가 상실된 인간의 헛된 말일 뿐이라는 것이다.

 

 

야고보는 율법의 온전함을 자유롭게 하는 것으로 말한다. 율법의 완성은 신자를 자유롭게 하는 것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율법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드러내는 매우 중요한 내용이다.

 

 

그런데 사람들의 관심은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로 향한다.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아는 것보다 율법을 듣기만 하지 않고 실천하는 것을 믿음의 중요한 덕목으로 여기는 것이다. 행함이 믿음을 믿음 되게 한다는 것인데 이것이 율법을 오해한 헛된 생각이다.

 

 

야고보는 율법이 신자를 자유로 인도하여 자유롭게 하는 것으로 그 온전함이 증거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않는 율법은 온전하지 않다. 그렇다면 현대 교회가 가르치는 율법이 과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지를 직시한다면 분명한 결론은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무거운 짐을 지운다는 것이다.

 

 

율법을 실천하는 행함이 있는 것을 산 믿음으로 가르치는 기독교에 자유는 없다. 오로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만 있다. 따라서 온전한 율법이 아니다.

 

 

야고보는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라고 말한다. 이것이 율법을 항상 머리에 기억하면서 하나하나 실천하라는 뜻일까? 단언하건대 그렇게 실천할 사람은 없다. 우리는 율법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조차 실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사람의 관심은 율법에 있지 않다. 만약 누구라도 율법에 모든 관심을 둘 수 있다면 그는 매일의 삶에서 주께만 관심을 두고 잊지 않을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자신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께 관심을 두고 동시에 자신에게도 관심을 두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의 관심은 오직 자신에게로 향한다. 이것이 죄다. 이러한 인간이 율법을 잊지 않고 실천하겠다는 것 자체가 자기를 속이는 것이다.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율법에서 보게 되는 것이 있다. 율법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죄를 알지 못하였다고 한 바울의 말대로 인간의 죄다.

 

 

따라서 율법을 들여다보게 되면 자기의 탐심을 보고 죄를 보게 된다. 그래서 율법, 말씀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성경을 읽고 기억하는 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뜻을 판단하는 하나님의 엄중한 말씀에서 자기 죄를 보는 것을 말한다.

 

 

율법을 잊지 않는 것은 자신의 죄인 됨을 아는 것이다. 야고보는 이것을 실천으로 말한 것이다. 육신으로 율법을 흉내 내는 실천이 아니라 율법이 보여주는 죄를 통해서 자신의 죄인 됨을 잊지 않는 것이 율법을 듣고 실천하는 신자라는 것이다. 이것이 자유롭게 된 신자의 실천이기에 무거운 짐 진자의 실천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율법은 죄를 보게 하여 십자가에서 피로 이루신 예수님의 용서로 이끌어 가며 용서에 속한 자로 자유롭게 한다. 이것이 율법의 완성이다. 예수님이 다 이루신 용서 안에서 내가 이룰 것이 없는 상태의 자유다.

 

 

그래서 예수님의 완성에 속한 신자에게는 개인의 실천이 없고 어떤 행함으로도 자신을 높이지 않게 된다. 십자가의 용서가 가장 가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것이 율법을 잊지 않는 신자의 실천이며 예수님의 용서 안에서 행하는 자유다.

 

 

야고보는 행하는 일에 복을 받는다고 한다. 율법에서 죄를 보는 것도, 자유롭게 되는 것도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일하심이다. 성령이 우리 안에 말씀을 두시고 내 안을 들여다보게 한다. 그리고 죄로 가득한 실상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나의 나 됨을 알고 예수님의 용서 안에서 행하는 자유는 성령의 일이다. 이러한 성령의 일하심으로 복을 받는다면 우리가 복을 위해서 할 일은 없다. 정말 신비한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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