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25 12:25

계 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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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20:6)

 

우리에게는 시간이 존재하고 시간에 의해 역사를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한다. 세상의 삶에서는 시간 개념이 필수적이지만 성경을 이해할 때는 큰 문제에 부딪힌다. 우리가 인식하는 시간 개념으로 성경을 해석함으로써 하나님의 일을 왜곡되게 해석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구원을 시간적 단계로 구분하는 것이 한 예가 될 수 있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사건이 일정한 흐름이 있는 시간적 단계를 거쳐 이루어진다는 발상이다.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구원은 대개 예정, 소명, 중생, 회개, 믿음, 칭의, 양자, 성화, 견인, 영화라는 순서로 되어 있다. 이것을 시간적 순서가 아니라 논리적 순서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구원을 단계로 나누는 시각에 시간적 개념이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구원을 시간과 단계로 구분하게 되면 회개는 예정을 앞설 수 없다. 하나님이 예정하지도 않은 사람이 회개할 수 없다는 반발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믿음이 오지도 않았는데 회개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도 피할 수 없다. 또한 예정, 소명, 중생 등의 단계를 거쳐 회개했다면 예정과 소명은 과거의 일이 되고, 믿음이 주어진다면 회개 역시 과거가 된다. 그리고 칭의, 양자, 성화, 견인, 영화는 현재에는 없는 미래의 일로 미루어진다. 이것이 인간의 시간 개념이 성경 해석에 미치는 잘못된 영향이다.

 

 

성경을 우리의 시간 개념으로 해석한다면 성경의 모든 사건은 지나간 역사, 즉 과거가 된다. 그리고 현재에 존재하는 우리는 과거의 성경 역사를 교훈 삼아 잘못된 것은 피하고 잘한 것을 본받는 실천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노력한 삶의 가치를 인정받아 미래에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이 지금의 기독교인이 알고 있는 구원의 내막, 구원의 흐름일 것이다. 물론 성경은 이러한 구원을 말하지 않는다. 단지 시간을 의식하는 인간이 풀어가는 헛된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세계를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세계에는 인간의 시간이 없다. 우리가 인식하는 과거, 현재, 미래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묵시라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의 세계, 십자가는 인간의 시간이 없는 묵시의 세계다.

 

 

그래서 십자가는 이미 흘러간 과거의 사건으로 기념하면서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라는 시간의 구분과 단절이 없이 현재의 우리에게 하나로 연결된 사건으로 이해해야 한다. 십자가에서의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이 현재의 사건으로 우리에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 시간이 없다면 천 년이란 말은 시간 개념으로 해석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시간 개념으로 해석함으로써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는 말을 천년 왕국으로 표현하면서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 등등의 이론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천 년을 시간적 개념에 의한 하나의 기간으로 이해함으로써 나타나는 오류다.

 

 

20:1-3절을 보면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사탄을 잡아 천 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넣고 잠그고 천 년이 차도록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인다고 말한다.

 

 

거듭 강조하지만, 이것을 시간 개념으로 이해한다면 뱀이 하와를 미혹한 일은 사탄이 천 년 동안 무저갱에 갇혀 있다가 놓인 후의 일인가?’에 대한 답을 제시해야 한다. 이것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을 하는 천년은 사탄이 갇혀 있을 때의 천년인지 사탄이 옥에서 놓여나온 후의 천년인지에 대한 답도 제시해야 한다. 결국 이해할 수 없고 답을 제시할 수도 없는 의문만 쌓이는 것이 시간 개념에 의한 해석이다.

 

 

천 년은 인간의 힘으로 들어갈 수 없는 다른 세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인간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세계를 천 년으로 말하는 것이다. 인간의 수명이 천 년을 넘지 못했다는 것이 이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천 년은 죄의 땅에 오셔서 홀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의를 이루신 예수님의 세계로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이 시간 개념에서 벗어난 천 년이다. 예수님이 홀로 다 이루신 세계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탄을 잡아 천 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넣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다 이루심을 믿지 않고 자기 힘으로 이루어야 할 것이 있음을 주장하며 자신이 이룬 것에 가치를 두는 악한 속성의 사탄이 영원히 무저갱에 갇힌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예수님이 다 이루신 천 년으로서의 십자가에서 인간의 행함을 의지하는 것은 무저갱에 던져질 결과를 초래할 뿐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다 이루심이 그대로 적용된 성도는 첫째 부활에 참여한 복이 있고 거룩한 자로 존재한다. 또한 둘째 사망의 권세 아래 있지 않으며 십자가 희생의 은혜를 증거하는 제사장이 되어 왕 노릇을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는 성도다. 십자가에서 이루신 예수님의 의로 거룩함을 얻은 자가 성도이기에 성도는 완성의 세계인 그리스도 안에서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로 존재하는 것이다.

 

 

천 년은 우리가 믿음을 지키고 행함으로 들어갈 수 없는 영역의 세계다. 예수님이 자기 피로 완성한 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행함을 고집하는 이들에게는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5) 라는 내용이 그대로 적용된다. ‘천 년이 차기까지라는 말 역시 시간적 개념이 아니라 다 이루심으로 인한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들이 첫째 부활과 관계없는 죽은 자다.

 

 

천 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 땅의 사방 백성을 미혹한다는 것도 사탄의 미혹이 천 년과 연관이 있음을 의미한다. 즉 그리스도의 다 이루심을 훼방하기 위한 미혹이다. 인간의 행함이 없는 믿음을 죽은 믿음으로 선동하고 구원의 효력이 있는 믿음을 위해 열심이 있어야 함을 주장하는 것이 우리를 미혹하는 사탄의 활동이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예수님의 의만 의지하는 성도는 첫째 부활에 참여하여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고 있다. 천 년의 영역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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