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02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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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14:3)

 

인간은 완전해질 수 없다. 어떤 노력과 수단, 방법을 동원한다 해도 결코 넘볼 수 없는 불가능의 영역이다. 따라서 자기에게 목적을 두고 믿음을 성장시키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실패로 끝난다. 아무리 성장한다 해도 완전에는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아를 당대에 완전한 자로 말하는 것을 보면 완전한 자는 있다. 하지만 노아의 완전은 노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관계에서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이 오셔서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되게 하심으로 완전한 자로 인정된다.

 

 

아브라함에게도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라고 말씀한다(17:1). 그런데 어떻게 행하라는 말씀이 없다. 아브라함의 힘으로 가능한 행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2절에서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라고 말씀한 이유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두시고 언약을 이루심으로 아브라함의 완전을 이루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행함은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것이다. 언약을 믿는 믿음이 아브라함을 완전에 이르게 하는 행함이다. 그리고 언약을 믿는 것은 자신의 힘을 버리는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임을 생각하면 노아의 완전과 다르지 않다.

 

 

하나님의 언약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성취된다. 그렇다면 성도의 완전은 언약으로 오신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생각해야 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언약과 완전에 관한 내용은 자신의 힘으로 믿음을 성장시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리에 이르겠다는 의도로 시도하는 우리의 모든 수단과 방법을 거부한다는 것을 주지해야 한다.

 

 

인간은 언약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기의 가능성을 포기하기 싫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의 행함을 거부하고 예수님이 홀로 이루신다는 언약은 인간과 대립한다. 영과 육의 대립이며 이것을 하나님의 전쟁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언약으로 인간과 전쟁하는 것이다. 전쟁의 대상은 언약을 믿지 않고 무시하는 하나님의 원수다. 다시 말해서 자기 피로 이루신 예수님의 의에 자기의 의도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십자가의 원수가 전쟁의 대상이다.

 

 

바울은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5:10)라고 말한다.

 

 

하나님과의 화목은 아들의 죽으심 안에서 이루어진 관계다. 또한 아들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원수 된 자로 인한 것이기에 자신을 하나님의 원수로 보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과의 화목은 없다. 그렇게 보면 땅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은 자신을 하나님의 원수로 여기는 성도로 연결된다.

 

 

십사만 사천은 이스라엘 자손의 열두 지파에서 일만 이천씩 인침을 받은 자의 숫자다(7:4). 그리고 일만 이천은 민 31장에서 모세가 미디안을 쳐서 여호와의 원수를 갚기 위해 각 지파에서 천 명씩 택하여 전쟁한 일과 연관된다. 즉 십사만 사천이 누구인지가 하나님의 전쟁을 통하여 드러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일만 이천 군사는 미디안을 쳐서 승리한다. 하지만 모세는 이들이 미디안 부녀들과 아이들을 사로잡고 가축과 양 떼와 재물을 탈취한 일을 책망한다. 여호와의 원수를 갚는 전쟁을 자기를 위해 탈취한 것으로 간주한 것이다. 이것으로 일만 이천의 이스라엘 군사는 여호와의 원수를 갚는 전쟁에서 실패자로 드러난다.

 

 

따라서 열두 지파의 일만 이천씩의 숫자는 성도의 본래 자리가 하나님의 원수이며 실패자라는 뜻이 된다. 그래서 십사만 사천에 믿음 좋은 자는 없다. 모두가 하나님의 원수고 실패자다. 하나님의 원수 되었을 때 아들의 피로 속량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자가 성도임을 십사만 사천으로 증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만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새 노래는 실패하고 원수 된 자에게 베풀어진 속량의 은혜를 아는 자만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천이라는 수는 인간의 힘으로 이룰 수 없음을 의미한다.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각 지파에서 천 명씩 일만 이천의 군사를 택한 것도 이스라엘의 힘으로 싸우는 전쟁이 아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승리한다 해도 자기의 힘으로 여기지 않아야 한다.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을 높이고 찬송하는 것이 여호와의 군사가 할 일인데 그들은 자기를 위해 미디안의 것을 탈취함으로써 자기 힘으로 이룬 승리처럼 여긴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실패이며 우리의 실패다.

 

 

자기의 실패를 아는 자는 십자가에서 홀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이룬 속량을 감사하고 노래하며 주의 의만 의지한다. 이런 점에서 새 노래는 저주받아야 할 하나님의 원수를 자신이 있어야 할 본래 자리로 인식하는 십사만 사천 외에는 배울 자가 없다.

 

 

새 노래의 가사에는 인간의 행함은 들어가지 않는다. 다만 피로 이루신 그리스도의 의의 행함만 들어간다. 십자가만 자랑하는 것이 새 노래라는 것이다. 그래서 새 노래는 인간의 행함에 가치를 두고 자랑하며 자기의 행함으로 믿음을 인정받고 그 믿음으로 복과 구원을 달성하고자 하는 자는 결코 배울 수 없다.

 

 

십사만 사천은 창세 전에 계획하시고 택하시고 부르심으로 하나님에 의해 확정된 성도를 말한다. 이것은 인간의 행함으로 변동되지 않는다. 십사만 사천은 자신의 선한 행함이 아니라 심판받아야 할 원수를 아들의 피로 속량하신 크신 사랑과 은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사만 사천이 의미하는 성도에게는 십자가의 피만 담겨 있다. 이들은 자신의 선함에 눈을 두지 않고 오직 아들의 피만 자랑한다. 노래는 승리한 자가 부른다. 그리고 사망을 삼킨 승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도에게 주신다. 그렇게 새 노래는 원수 된 자에게 베풀어진 십자가의 사랑에 눈뜬 자가 배우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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