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23 11:32

고전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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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고전 14:34)

 

성경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말씀이고 명령이기에 복종하고 지켜야 한다는 것이 교회의 주장이다. 이 주장대로라면 성경은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여 지금의 교회에도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규범으로 작용하여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은 개인적 입장을 고려하지 않을뿐더러 남녀노소를 구별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유념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라는 바울의 말을 교회가 지켜야 할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인다면 지금의 교회는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고 무시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여자 교인에게 잠잠해야 한다며 말하는 것을 금지하는 교회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교회가 바울의 말을 근거로 여자에게 잠잠하라고 한다면 여자는 반발할 것이다. 물론 무작정 반발하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고전 11:11), 남자나 여자가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3:28)와 같은 남녀평등을 주장할만한 성경 구절을 근거로 할 것이다. 결국 서로가 바울의 말을 인용하며 대립하는 관계가 되는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 교파에도 계속된 대립이 하나 있는데 여성 목사 안수문제다. 여자 목사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딤전 2:12)라는 구절을 근거로 세우지만 찬성하는 사람들 역시 앞에서 말한 같은 바울의 말을 근거로 자기주장을 펼친다.

 

 

그렇다면 바울이 교회의 형편에 따라 상반된 말을 하는 것인가? 아니면 바울은 여자 문제와 관련해서도 변함없이 십자가라는 일관성과 통일성이 있는 복음을 제시하는데도 불구하고 인간이 자기 개인적 선입관과 입장에 따라 다른 해석을 하는 결과인가?

 

 

우리가 분명히 직시해야 하는 것은 바울의 모든 말은 일관성 있게 십자가만 증거하는 복음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여자 목사를 반대하거나 찬성하는 자기주장에 바울의 말을 이용하는 것은 바울과 같은 시선으로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는다는 증거다.

 

 

바울은 교회에서 잠잠해야 하는 것을 여자로 국한하여 말하지 않는다. 바울은 방언의 은사를 받았지만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하고(23), 예언하는 자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하라고 한다. 따라서 여자가 교회에서 잠잠해야 하는 것은 방언과 예언의 은사 문제와 연결하여 해석하는 것이 옳다.

 

 

이것은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33) 라는 말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고린도 교회의 무질서는 은사로 인한 것이었다. 은사를 받았다는 것은 성령이 활동하고 있다는 증거다. 누가 은사를 받는다 해도 그 사람의 조건과는 무관하다. 개인의 믿음과 능력과 열심에 의해 주어지는 은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사는 인간의 믿음과 능력을 높이기 위해 주어지지도 않는다. 그런데 인간이 자기가 받은 은사를 우월한 것으로 여기고 은사 받은 자신을 자랑한다면 결국 여러 은사가 있는 교회는 서로 자기 것을 자랑하는 혼란에 처하게 된다. 이것이 교회의 무질서다.

 

 

은사는 성령이 신자를 다스린다는 증거다. 신자가 은사를 받았다 해도 심판을 받을 저주의 존재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방언도 예언도 신자를 믿음 있는 자로 높이지 않는다. 다만 죄인임을 고백하며 예수님이 피 흘려 이루신 십자가 의만 증거하는 것이 은사로서의 방언이고 예언이다.

 

 

따라서 은사를 받은 성도에게서는 자기의 것을 더 나은 것으로 자랑하고 높이는 말이 나올 수 없다. 이것이 잠잠하라는 말의 의미이며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해야 할 일이고 이 일이 교회의 화평으로 드러난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을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라는 말과 연결하여 이해하면 여자만 무조건 교회에서 잠잠하고 침묵해야 한다는 뜻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여자에게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다는 것도 발언 자체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자랑하고 높이는 말을 허락함이 없다는 뜻이다. 교회는 십자가를 증거하는 계시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교회에 허락된 말은 복음을 증거하는 하늘의 언어일 뿐이다.

 

 

바울은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이유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딤전 2:13,14)로 말한다.

 

 

이것을 대개 문자대로 창조 순서와 뱀에게 속은 당사자가 여자이기 때문으로 해석한다. 그런데 존재의 순서로 따지자면 남자보다 예수님이 먼저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가 예수님이고 우리는 예수 안에서 죄사함을 얻었다. 결국 예수 안에서는 아담이 아니라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누가 먼저든 남자 역시 죄에 빠진 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울은 왜 여자를 앞세워 말하는가? 그것은 인간의 연약함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다는 것도 여자가 남자보다 잘못했다거나 죄의 유혹에 더 약하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죄에 빠진 연약한 존재임을 증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여자를 통해 증거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여자는 남자의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는 것도 실제 여자와 남자의 위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여자의 위치에 있는 우리는 신랑으로 오신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관계에 있음을 의미한다.

 

 

 

율법이 이르는 것은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인간의 연약함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은 인간의 연약함을 알고 자기를 자랑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잠잠하라는 말로 가르친다. 그래서 성도가 율법에 복종하는 것은 교회에서 잠잠하게 되는 것으로 드러난다. 자기가 아니라 십자가에만 뜻을 두는 성도의 말은 다르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참된 의미가 속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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