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27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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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32:28)

 

성경에는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일을 경험한 사람들이 있다. 야곱도 그 중의 한 사람인데 거의 하나님이 복을 주려고 특별히 찾아오시고 만나시는 것으로 해석한다. 야곱을 찾아온 천사가 야곱에게 축복한 것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 씨름이 등장한 것을 두고 축복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 씨름하는 믿음의 열심과 수고가 있는 사람에게 주어진다라는 말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한 개인을 만나고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은, 그를 통하여 하나님이 누구시며 무엇을 위해 일하시는가를 나타내기 위함이다. 그것으로 인간이 하나님을 잘못 알고 오해하고 있음을 직접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한 사람을 통하여 보이시는 것이다. 창세기 32장의 야곱 이야기는 이러한 취지에서 이해해야 한다.

 

 

출생지로 돌아가라(31:13)는 말씀에 따라 고향으로 가던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난다(1). 하나님의 사자가 야곱을 찾아온 것이다. 야곱은 그들을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두 진영, 두 개의 군대라는 뜻의 마하나임이라 한다(2). 야곱이 자기보다 앞서 에서에게 보낸 자신의 사자, 즉 자기의 군대와 하나님의 군대를 생각하고 이름한 것으로 짐작된다.

 

 

고향으로 가는 야곱은 편한 마음이 아니었다. 에서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온다는 소식을 듣고 심히 두려워하고 답답해한 것을 보면 에서를 속였던 야곱이 그의 보복을 두려워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길에서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하신 하나님이 자신을 지켜주기 위해 천사를 파견한 것으로 오해했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은 나를 지켜주신다라고 제멋대로 믿는 인간의 오해임을 하나님의 사자가 야곱을 찾아와 만남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들을 자신을 지켜줄 하나님의 군대로 알았다면 에서를 향한 두려움은 완전히 해소되어야 한다. 에서가 강하다 해도 하나님의 군대를 이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야곱은 여전히 두려워했고 자기와 함께 한 동행자와 양과 소와 낙타를 두 떼로 나눈다. 에서가 와서 치더라도 절반은 남기겠다는 인간적인 계략이다. 결국 야곱이 하나님의 군대를 만나고 경험한 일은 두려움을 해소하는 일에 아무 효력이 없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자들이 야곱을 만난 이유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군대가 너와 함께하고 너를 보호하니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라라는 취지라면 완전한 실패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자신을 모든 해로움에서 지켜주고 일이 잘되도록 도와주기 위한 것으로 말하지만 날마다 실패로 드러나는 것과 같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매일 세상일을 염려하고 두려워하며 야곱처럼 스스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방비책을 세우며 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자들이 야곱을 만난 것은 야곱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한 개인을 도와주고 지켜주기 위해 일하시는 분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 된다. 그렇게 하나님을 나의 수호신처럼 생각하는 믿음의 잘못됨이 드러나는 것이다.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하신 말씀의 취지를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한 것으로 이해한다(9). 이어서 지팡이만 가지고 요단을 건넜는데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다는 말로 하나님은 자기를 도와 일하시는 자기편임을 확고히 한다(10). 그렇게 하나님은 내 편이다라는 믿음으로 에서의 손에서 건져 달라는 기도를 한다(11). 이러한 야곱을 통해서 지금의 기독교인이 하나님을 내 편으로 생각하고 기도하는 믿음이 믿음이 아닌 것으로 드러난다.

 

 

야곱이 모든 일행과 소유를 먼저 얍복 나루를 건너게 하고 홀로 남았을 때 어떤 사람과 날이 새도록 씨름하게 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라는 내용을 보면 어떤 사람이 야곱을 찾아와 벌인 씨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복에 대한 야곱의 오해를 드러내며 그러한 야곱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보이기 위함이다.

 

 

야곱은 밤중에 나타난 어떤 사람을 자기를 해치려는 적으로 알았을 수 있다. 즉 처음부터 복을 주는 천사로 알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야곱이 씨름에서 지지 않으려고 한 것은 복을 받고자 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의지고 욕망이다. 이러한 야곱의 의지를 이길 수 없음을 알고 허벅지 관절을 쳐 어긋나게 한다. 자기를 위한 인간의 욕망이 하나님조차 이기려고 할 정도로 강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씨름하던 그 사람이 야곱에게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고 한다(26). 관절이 어긋난 야곱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어서 그를 강제로 붙들 수 없다. 그렇다면 그냥 가면 되는데 왜 굳이 가게 하라고 말하는 것인가?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야곱과 씨름한 사람을 하나님의 사자, 천사로 이해한다. 그런데 무슨 천사가 날이 새려 한다는 이유로 떠나려고 하는가? 전설의 고향에 등장하는 귀신도 아니고 어둠에서만 활동하고 빛은 무서워하는 천사인가?

 

 

우리가 주지할 것은 야곱으로 인해 드러나는 인간성이다. 자기를 기준으로 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해석하고 자기를 위해 일하는 수호신처럼 믿는 것이 어둠에 속한 인간의 악한 속성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찾아와 싸우시고 구원하는 백성은 빛이 아니라 어둠에 있는 자다. 이것을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는 것으로 보이시는 것이다. 스스로 빛에 있다고 생각하는 자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으로 연결된다. 빛이 아니라 어둠에 있는 자를 부르러 오신 것이다. 따라서 자신을 어둠으로 보게 되는 그들이 하나님이 찾아와 싸우시고 이기신 결과물인 성도로 드러난다.

 

 

야곱의 이름을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라는 의미의 이스라엘로 부르라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길 수 없다는 것이 해석을 어렵게 한다. 그래서 이 내용은 언약 안에서 해석해야 한다.

 

 

하나님은 어둠에 있는 악한 인간에게는 저주하고 심판하는 무서운 분이다. 따라서 야곱으로 드러난 인간성에 의하면 야곱에게도 저주하고 심판하는 무서운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것은 기어코 복을 받아 낸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이겼다는 뜻이 된다.

 

 

야곱은 씨름에서 관절이 어긋났다. 즉 야곱이 씨름으로 하나님을 이긴 것이 아니라 이김이 되는 요소가 야곱에게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하나님의 언약이다. 이러한 야곱 이야기가 증거하는 것은 저주와 심판을 이기는 것은 언약으로 오신 예수님의 의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의가 우리에게 이김이 된다. 따라서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하나님이 찾아와 일하심으로 만들어지는 언약 안에 있는 새로운 나라를 뜻한다. 언약의 완성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이스라엘이며 예수 안에서 의롭게 된 성도가 이스라엘에 속한 백성으로 구원받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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