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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3:15)

 

인간을 유혹한 사탄의 권세 아래 있는 세상은 지금도 여전히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운 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다. 이처럼 사탄의 권세에 붙들려 통치받는 세상에 예수님이 오셨다. 그렇다면 예상되는 것은 사탄과 예수님의 싸움이다. 그리고 당연히 예수님이 사탄을 굴복시켜 승리하고 예수님의 권세로 다스려지는 나라를 이루시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 그렇게 사탄을 이기신 예수를 믿는 자를 예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인정하면 되지 않을까?

 

 

그런데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사탄의 통치를 받는 인간에게 붙들려 죽임을 당하신다. 이 일은 마치 예수님이 사탄에게 패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패배가 아니라 사탄의 권세인 죽음을 이기신 승리라고 말한다.

 

 

하지만 여전히 사탄의 권세에 붙들려 죄를 극복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실제적 승리로 실감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사탄을 완전히 심판 하시는 마지막 날에 성도는 죽음에서 부활하여 영원한 천국에 들어간다는 막연한 기대를 믿음으로 알고 있는 수준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예수님과 사탄의 싸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것은 십자가 죽음을 어떤 시각으로 접근해야 하는가?’의 물음이 되기도 한다. 물론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죽음으로 말한다. 그것이 기독교인에게 일반화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상식이고 지식이다.

 

 

하지만 ?’라는 물음과 함께 좀 더 근본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죄가 용서되었고 부활을 죄의 권세인 죽음을 이기신 것으로 알고는 있지만, 사탄과의 싸움의 의미를 알지 못함으로 여전히 사탄의 통치를 받으면서도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선악과를 먹은 사건 이후에 본문의 말씀으로 약속을 세우신다. 그런데 이 약속의 말씀에 장차 이루어질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담겨 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등장하게 되고, 이 두 후손은 서로 원수의 관계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자의 후손은 뱀, 즉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뱀은 여자의 후손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는 말씀이 십자가의 죽음을 예고한다. 이 약속의 말씀이 현실로 구현되려면 사탄의 다스림을 받고 그의 후손으로 존재하는 세상에 여자의 후손이 등장해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오심이다.

 

 

여자의 후손은 남자 없이 여자만으로 존재하는 사람을 뜻한다. 따라서 남자 없이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님 외에 누구도 여자의 후손이 될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은 남자로 인해 존재하는 모든 인간을 아담 안에서 죽은 자로 선언한 것이다.

 

 

여자의 후손인 예수님이 사탄이 통치하는 세상에 오셨다면 하나님의 약속대로 사탄의 머리가 상하고 예수님의 발꿈치가 상하는 싸움이 있어야 하는데 그 싸움의 현장이 십자가다.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 있다고 주장하는 유대교, 즉 사탄의 통지로 드러나는 인간의 종교 세계에 예수님이 오심으로 사탄과의 싸움이 펼쳐진 것이다.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이라 하신 것도 그들의 종교 세계가 곧 사탄의 속성으로 사탄의 후손임을 드러내신 것이다.

 

 

물론 인간은 이러한 싸움에 무지하다. 자신들이 뱀의 후손으로 사탄의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니 자기가 옳다고 굳건히 믿는 믿음이 오히려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하나님 아들의 원수로 행하고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없다.

 

 

그러면 머리를 상하게 하고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는 약속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것은 당연히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 없다. 아무리 성경을 뒤져 봐도 예수님이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셨다거나 사탄이 예수님의 발꿈치를 상하게 했다는 내용은 없다. 하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이 말씀은 이루어졌다.

 

 

머리는 신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에 속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사탄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다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사실 그러한 말은 판타지 소설의 수준이다. 사탄을 볼 수 없는 우리는 사탄이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는 것을 볼 수 없고 알 수도 없다. 또한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면 활동에 문제가 있어야 하는데 그러한 느낌을 받을 수 없다. 베드로가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말한 것처럼 사탄은 여전히 왕성하게 자기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발꿈치는 신체 중에서 크게 중요하지 않은 부분으로 해석하고 예수님이 죽임을 당한 것은 발꿈치가 상한 정도인 것으로 말하기도 한다. 머리가 상한 사탄에 비해 예수님께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할 정도로 상처가 아주 경미 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강하고 사탄은 약하다는 것을 이러한 해석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도무지 십자가에 관심이 없고 단지 인간의 호기심으로 접근하는 복음과 상관없는 해석들이 예수님의 발꿈치를 상하게 한 사탄의 후손다운 생각이다.

 

 

시편 83:2절에 보면 무릇 주의 원수들이 떠들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이 머리를 들었나이다라고 말한다.

 

 

머리를 든다는 것은 자신을 악한 자로 인정하지 않고 옳음을 주장한다는 표현이다. 사탄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죽는다고 하신 말씀을 알고 있으면서도 하와에게 결코 죽지 않는다라며 자기 말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머리를 드는 것이다.

 

 

따라서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것은 머리를 들지 못하게 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을 대신한 예수님의 죽음은 모든 인간이 죄로 인해 죽었음을 선언한다. 따라서 십자가는 누구도 예수님 앞에서 머리를 들 수 없게 한다. 그렇다면 누가 뱀의 후손인가? 지금도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옳음과 선함을 주장하며 머리를 드는 그들이다.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것도 사탄이 약해서 예수님께 가벼운 상처만 입힐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발꿈치를 예수님의 신체로 생각하면 예수님은 온몸에 상처를 입으셨다. 따라서 도무지 문자적으로는 해석이 안 된다.

 

 

발꿈치는 발자국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렇게 보면 사탄은 예수님의 발자국, 즉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상하게 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예수님과 사탄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사탄은 예수님을 믿는 자를 돕고 세상 영광을 이루는 길로 가라고 시험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의 일과 자기 영광을 위해 예수를 믿는 이들이 사탄의 후손으로 예수님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 된다.

 

 

 

사탄의 시험을 이기고 십자가의 길로 가신 예수님의 마음이 성령을 통해 오신 이가 성도다. 그래서 성도는 십자가 앞에서 자기 죽음을 알기에 머리를 들지 못한다. 자신의 의와 공로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만 믿고 자랑한다그래서 성도는 머리가 상한 자이며 그의 머리는 예수님이 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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