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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2:10)

 

자기 믿음에 갈증을 느끼는 기독교인이 많다. 세상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주를 따라가려면 믿음이 강해야 하는데 약하다며 아쉬워한다. 하나 같이 자기의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기기보다는 항상 넘어지는 것 같은 삶에서 강한 믿음에 대한 갈증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강한 믿음이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도 하지만 결국 자기 갈증을 해소하고 믿음이 우월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다. 물론 교회는 세상 것이 아니라 믿음을 구한다는 이유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정당한 기도라고 말하겠지만 자기에게 관심을 두는 욕망의 기도라는 점에서 기도가 아니다.

 

 

믿음이 강해져서 그 믿음으로 죽기까지 충성하려는 사람이 있을까? 설령 하나님을 위해 죽기까지 충성하는 믿음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한다 해도 삶은 기도와 전혀 다르다. 진심으로 죽음도 마다하지 않고 하나님께 충성하려는 의도는 보이지 않는다. 자기 사랑으로 채워진 것이 우리의 삶이기 때문이다.

 

 

요한은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라고 말한다. 기독교인들이 받고자 하는 것이 생명의 면류관인데 죽도록 충성해야 준다고 한다. 죽도록 충성하지 않으면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자칫 살아생전 예수를 믿으며 교회를 다니고 수고했던 모든 것이 허사가 될 판국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죽도록 충성하는 것밖에 없다. 문제는 인간의 자기 사랑이 죽음을 요구하는 충성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죽도록이라는 말의 의미를 실제의 죽음이 아니라 죽을 정도가 되도록 힘써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몸이 피곤하고 힘들 정도로 교회 일에 매달린다. 특히 교회가 직분자를 세울 때 이 구절을 인용하여 교회 일에 온 마음과 힘을 다해 충성하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시도는 악마적일 뿐 믿음도 충성도 아니다.

 

 

우리는 죽도록 충성하라라는 말에 시선을 두게 되지만 요한은 먼저 고난에 대해 말한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마귀가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마귀가 몇 사람을 옥에 던진다는 것이다. 이 내용대로라면 고난은 옥에 던져진 사람만 받게 되는데 이것이 우리가 이해하는 고난과 다르다는 점에서 의문이다.

 

 

고난은 모든 성도에게 해당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를 그리스도와 함께 한 하나님의 상속자로 말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하는 것으로 말한다(8:17). 따라서 성도에게 누구는 받고 누구는 받지 않은 고난은 없다. 그런데 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한다는 것일까? 그리고 환난의 기간을 십 일로 말한다는 것도 유의해야 한다.

 

 

마귀가 몇 사람을 옥에 던지는 시험과 십 일 동안의 환난 이야기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열흘 동안 채식과 물을 먹는 시험과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다(1:9-16).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환관장 아스부나스에게 포로로 끌려온 유다 자손의 왕족과 귀족 중에서 흠이 없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모든 지혜를 통찰하며 지식에 통달하여 왕궁에 설 만한 소년을 데려오게 한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다니엘과 세 사람이 있었는데 이들 몇 사람을 유다 자손을 대표하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마귀가 옥에 던져 시험하는 몇 사람은 성도 된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다.

 

 

환관장은 다니엘과 세 사람의 이름을 벨드사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로 고친다. 모두 바벨론식 이름이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했을 때 단행했던 일본식 성명 강요와 다르지 않다. 이름을 고치게 하여 일본화하는 것으로 일본의 위대함을 드러내려는 의도로 해석할 수 있는데 환관장의 의도도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유다는 하나님을 믿고 바벨론에도 자기들이 믿는 신이 있다. 그런데 유다가 바벨론의 포로가 된 것을 유다의 신이 바벨론의 신에게 패배한 것으로 본다. 그들에게 신은 믿는 자를 도와 힘 있는 국가로 번성하게 존재이기 때문에 유다의 멸망이 하나님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즉 현실에서 드러나는 소유와 번성으로 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믿는 것인데 이것을 어둠에 속한 죽음의 현장으로 증거하는 것이 십자가 복음이다.

 

 

다니엘은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겠다는 뜻을 정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도록 환관장에게 구한다. 그리고 열흘 동안 채식과 물을 먹었음에도 왕의 음식을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얼굴과 살이 더 좋아 보였다는 것이 시험의 내용이다.

 

 

이것은 당연히 몸의 건강을 위해 고기보다 채식을 먹어야 함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먹을 것이 넘치는 현대 사회는 건강을 위한 채식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고대 사회의 형편에서 채식은 가난한 자들의 음식이다. 즉 다니엘은 왕의 음식과 포도주를 먹는 부요를 거절하고 가난의 자리로 들어가는 것이다.

 

 

다니엘은 하나님을 부요의 신이 아니라 생명으로 믿었다. 이것을 왕의 음식을 거절하는 것으로 보인 것이다. 따라서 채식과 물을 먹었음에도 왕의 음식을 먹은 자들보다 얼굴이 좋았다는 것은 채식이 좋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이 참된 복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십 일 동안의 환난은 자기를 부요하게 하는 신을 믿는 어둠의 세상에서 생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에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바벨론과 같이 많은 소유와 세상에서의 성공을 신이 주는 축복을 알고 믿는 현실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믿는 믿음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이 마귀가 주는 십 일 동안의 환난이다. 그래서 성도라면 누구나 이 환난에 있는 것이다.

 

 

 

믿음은 자기 욕망으로 신을 찾았던 것을 죄로 간주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에 있기를 소망하게 한다. 그래서 십자가 사랑에 있게 된 자들은 모두가 죄로 인해 죽은 자들이다. 즉 자기의 죽음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사랑에 거하는 자는 없다. 이것이 죽도록 충성하라는 의미다. 교회가 아닌 그리스도의 사랑에 충성하라는 것이며, 몸으로 수고하는 충성이 아니라 믿음에 있는 것이 충성이다. 이 믿음이 우리를 그리스도를 생명의 관으로 받은 성도 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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