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피로써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되었다는 것은 기독교의 기본 진리다. 이 진리를 모르고서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리는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리 아래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즉 예수님의 피의 용서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용서 아래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점을 두고 생각해 볼 때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용서를 말하긴 하나 용서 아래 살아가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스스로 세워놓은 믿음의 행위규범을 기준하여 자신을 판단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기도를 많이 할수록 믿음이 있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은 자신이 기도를 많이 하는가 적게 하는가의 여부로 자기 믿음을 판단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기도를 많이 하지 않는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실 것이고,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복을 받지도 못할 것이라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행위 규범으로 자신을 판단하는 것이며, 이러한 사람은 아무리 예수님의 용서를 고백한다고 해도 사실 용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자이며 용서 아래 살고 있는 자로 볼 수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결국 자신의 행위 규범을 가지고 자신을 판단한 것과 같은 동일한 기준과 시선으로 타인의 믿음을 판단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누구든 자기 규범으로 타인의 믿음을 판단한다면 그 역시 예수님의 용서 아래 있는 자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용서는 우리의 모든 악함과 불의함을 덮어주신 은혜다. 우리의 악함을 보지 않으시겠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용서는 신자의 잘함과 못함의 여부를 따져서 그에 따른 상과 벌을 내리시는 것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행위를 기준하여 믿음을 판단하고 행위를 잘함과 못함으로 구분하여 상벌로 나누는 것이야 말로 용서의 은혜를 무시하는 것이며 예수님의 피 흘리심 자체를 모독하는 것과 진배없다.
따라서 교회가 교인들에게 특정 행위를 내세워 그것을 믿음이 있는 것으로 가르친다면 그 교회는 예수님의 피로써 이루어진 용서에서 벗어나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의 용서 아래서 용서의 은혜를 누리는 신자는 행위적 규범을 기준으로 하여 자신을 판단하지 않는다. 다만 용서의 은혜에 감사하며 기뻐할 뿐이다. 이러한 신자가 타인의 행위에 대해 자기 멋대로 판단하거나 심판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 역시 예수님의 용서 아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용서를 선포함으로써 교인들로 하여금 자기 행위가 아니라 용서를 바라보도록 돕기 위한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그래서 교회는 교인들에게 행함을 요구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소위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되는 행함이 있다고 하는 것이야 말로 교인들을 그리스도의 용서의 은총으로부터 끌어내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자기 행함에 만족한자는 행함을 바라보게 될 것이고, 행함이 부족하다고 여기는 자는 자신을 심판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교인들이 자기 행함에 대해 방종할까 두려운가?
하지만 신자의 행함은 목사가 감시하고 간섭할 부분이 아니다. 신자의 행함은 하나님이 선물로 허락하신 믿음이 간섭하고 다스리고 있기 때문이다.
목사가 교인에게 어떤 행함을 요구하는 것은, 결국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도일 뿐이다.
진심으로 교인을 지체로, 형제로 바라보며 사랑의 마음이 있다면 오직 그리스도의 용서를 선포함으로써 용서를 알고 기뻐하며 감사하는 신자가 되기를 원해야 할 것이다.
(2005.6)
그러나 진리는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리 아래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즉 예수님의 피의 용서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용서 아래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점을 두고 생각해 볼 때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용서를 말하긴 하나 용서 아래 살아가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스스로 세워놓은 믿음의 행위규범을 기준하여 자신을 판단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기도를 많이 할수록 믿음이 있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은 자신이 기도를 많이 하는가 적게 하는가의 여부로 자기 믿음을 판단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기도를 많이 하지 않는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실 것이고,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복을 받지도 못할 것이라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행위 규범으로 자신을 판단하는 것이며, 이러한 사람은 아무리 예수님의 용서를 고백한다고 해도 사실 용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자이며 용서 아래 살고 있는 자로 볼 수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결국 자신의 행위 규범을 가지고 자신을 판단한 것과 같은 동일한 기준과 시선으로 타인의 믿음을 판단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누구든 자기 규범으로 타인의 믿음을 판단한다면 그 역시 예수님의 용서 아래 있는 자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용서는 우리의 모든 악함과 불의함을 덮어주신 은혜다. 우리의 악함을 보지 않으시겠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용서는 신자의 잘함과 못함의 여부를 따져서 그에 따른 상과 벌을 내리시는 것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행위를 기준하여 믿음을 판단하고 행위를 잘함과 못함으로 구분하여 상벌로 나누는 것이야 말로 용서의 은혜를 무시하는 것이며 예수님의 피 흘리심 자체를 모독하는 것과 진배없다.
따라서 교회가 교인들에게 특정 행위를 내세워 그것을 믿음이 있는 것으로 가르친다면 그 교회는 예수님의 피로써 이루어진 용서에서 벗어나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의 용서 아래서 용서의 은혜를 누리는 신자는 행위적 규범을 기준으로 하여 자신을 판단하지 않는다. 다만 용서의 은혜에 감사하며 기뻐할 뿐이다. 이러한 신자가 타인의 행위에 대해 자기 멋대로 판단하거나 심판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 역시 예수님의 용서 아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용서를 선포함으로써 교인들로 하여금 자기 행위가 아니라 용서를 바라보도록 돕기 위한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그래서 교회는 교인들에게 행함을 요구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소위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되는 행함이 있다고 하는 것이야 말로 교인들을 그리스도의 용서의 은총으로부터 끌어내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자기 행함에 만족한자는 행함을 바라보게 될 것이고, 행함이 부족하다고 여기는 자는 자신을 심판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교인들이 자기 행함에 대해 방종할까 두려운가?
하지만 신자의 행함은 목사가 감시하고 간섭할 부분이 아니다. 신자의 행함은 하나님이 선물로 허락하신 믿음이 간섭하고 다스리고 있기 때문이다.
목사가 교인에게 어떤 행함을 요구하는 것은, 결국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도일 뿐이다.
진심으로 교인을 지체로, 형제로 바라보며 사랑의 마음이 있다면 오직 그리스도의 용서를 선포함으로써 용서를 알고 기뻐하며 감사하는 신자가 되기를 원해야 할 것이다.
(200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