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2.30 11:35

아버지와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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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그 첫 마디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부름으로 시작하라고 하신다. 이것은 단순히 기독교라는 종교가 하나님을 호칭하는 상투적인 말이 아니라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는 절대자가 나의 아버지로 분명히 존재하신다는 온전한 확신의 표현이다.

그런데 현대 교인들은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등등 온갖 말을 끌어다 붙이며 하나님을 높이는 듯 하지만 사실은 그 말의 의미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상투적인 말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생각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하기보다 ‘전지전능하신’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이 하나님을 더 높이는 것 같고 신앙이 더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바르게 알아가는 것보다는 단지 열심만 있으면 된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 그러니 거창하게 ‘특별 새벽 100일 기도회’라는 말도 안되는 짓을 예사로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복을 꼭 받아야겠는데 기도 응답이 잘 안되니까 특별 새벽 100일이라는 자기 열심을 동원해서 하나님과 한 번 끈기 시합을 하자고 덤비는 꼴이다.

관심이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 응답에 있기에 ‘전지전능’ ‘무소부재’와 같은 아무리 듣기 좋은 말을 다 갖다 붙인다고 해도 그것들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쓰레기 같은 말에 불과할 뿐이다.  

부모 자식간은 반드시 서로 이름으로 불리워져야 하고 이름이 없으면 구분이 안되는 그런 일상적인 사이가 아니다. 어떠한 이해타산 관계도 둘 사이에 개입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아버지가 자식이 원한 대로 뭔가를 들어줘야 아버지의 존재성이 확립되는 것이 아니다. 자식에게 아버지는 그냥 아버지일 뿐이다. 아버지로 존재하시는 것만으로 자식에게는 든든함이 된다. 이런 아버지가 현대 교인들에게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기능으로서의 아버지로만 인식된다면 그것처럼 안타까운 일도 없다.

그러므로 특별 새벽기도 운운하는 것부터가 자식이 아버지를 모르고 자식이 무엇인가를 모른다는 증거일 뿐이다.

신자란 하나님을 부르지 않아도 자기 인생의 모든 부분에서 그 분을 인식할 수 있는 자여야 한다. 이런 면에서 조명해 볼 때 현대 교인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만 사실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에서 너무 멀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마태복음 14장 22절 이하를 보면, 배를 타고 가다가 한 밤중에 바람을 만나 곤경을 당하고 있는 제자들이 물 위로 예수님이 걸어오자 유령인줄 알고 무서워하는 장면이 있다. 그때 예수님은 자신을 ‘내다’라는 말로 표현하신다(마4:27).

한 번 가만히 생각해 보라.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내다”라고 말 하고 계신다는 것이 갖는 의미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를…

하나님이 “내다”라고 하시는 데  감히 세상의 어떤 것으로 그 앞에 반발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분 앞에는 인간의 어떤 항변과 역설과 불평과 불만과 재론이 설 자리라고는 전혀 없다. 구태여 소리 내고 기도나 찬양을 하지 않았지만  주일 날 교회에 나와 앉는 순간, 아직 본문을 읽지도 않았지만 성경 첫 장을 여는 순간, 범사가 오직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면 어떤 일이든 시작하려는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내다”라고 다가오신다.

나아가 하나님 앞으로 마음과 생각을 모으기만 해도 그 분만이 주실 수 있는 평강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아이가 밤중에 천둥 번개가 치거나 무서운 꿈을 꿔 아빠 방으로 뛰어 갈 때에 아빠 방문 앞에서 아빠라고 부르기만 해도 그 두려움은 사실 반 이상 없어진다.

왜 그런가? 비록 방문이 닫혀 아빠의 모습은 안 보이지만 방 안에 아빠가 계시다는 것을 알고 전혀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빠라고 불렀을 때 아직 방 안에서 문을 열고 나오지 않았지만 “왜 그래 아빠 여기 있어” 라고 하면 그 공포는 씻은 듯이 없어지지 않는가?

신자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로 기도를 시작하는 뜻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로 계신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신자에게는 평안이며 든든함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버지로 계시고 자기 백성에게 ‘내다’라고 하시며 아버지로 다가오시는데 더 이상 무슨 다른 위로와 은혜가 필요하단 말인가?  

(2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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