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1.09 09:54

이단 107 (관상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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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부패의 상태 그대로일 뿐이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 깨끗하고 거룩한 자로 여김 받는 것이다. 때문에 관상기도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본질을 도외시한 주장일 수밖에 없다.

이들은 관상기도가 예수님의 기도였고 마리아의 기도였다고 한다. 또한 예수님이 자신의 인간성 안에서 그리고 자신의 인간성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일치를 체험했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요 14:11)고 하셨다. 예수님은 창세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셨다.

이 같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예수님이 자신의 인간성을 통해서 체험했다는 것은 하나님으로 오신 예수님이심을 간과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은 예수님의 인간성이 우리의 인간성과 동일하다고도 하는데 이 또한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신 그 이유를 간과한 것이다.

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셨지만 우리의 인간성을 가지고 오신 것은 아니다. 만약 예수님이 우리와 동일한 인간성을 가지고 오셨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죄인의 몸이 아니라 죄인으로 오셨다는 의미가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간성은 부패하고 더럽고 악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죄 없는 인간으로 오셨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신 것이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관상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일치를 체험했다는 주장은 예수님을 인간의 수준으로 바라보는 것일 뿐이다.

이들은 예수님의 인간성이 우리의 인간성과 동일하고, 우리의 인간성과 동일한 예수님이 관상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일치를 체험했기 때문에 우리 또한 관상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일치를 체험할 수 있다고 하지만 이 모든 말들이 성경에서 벗어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8)고 하신다. 이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을 본 것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외적인 실상을 목격하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로 확증되어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된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셨고 그 사랑을 깨닫게 되고 알아가는 것이 곧 하나님을 본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을 만나고 알게 되고 체험하는 것은 관상기도라는 방법을 통한 심리적인 현상이 아니라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알고 그 사랑과 긍휼에 붙들리고 기뻐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성령으로 인해 우리의 안에서 역사되는 놀라운 기적의 사건이지 관상기도라는 방법과 인간의 노력과 열심히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관상기도를 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첫째는 인간이 좋은 지향을 가지고도 극복할 수 없는 습관적인 결점과 약점들(예를 들면, 조급한 비판, 화내기, 심한 말들, 적대감, 우울증에 빠지기)이 있는데 관상기도를 통하여 그러한 결점들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줄어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관상으로 죄의 뿌리와 근원을 제거할 수 있다고도 한다. 한국교회가 가르치는 성화와 흡사하다.

과연 비판과 분냄과 심한 말을 하는 것 등이 줄어들면 인간이 달라졌다고 할 수 있을까? 죄의 근원은 자기 사랑이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존재로 지음 받은 피조물이 자기 사랑으로 눈을 돌린 것이 죄다. 그런데 관상이라는 방법으로 하나님과의 일치를 추구하고, 하나님과의 임재를 체험하고자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자기 존재 가치를 확대하고자 하는 자기 사랑이라는 것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