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3.31 09:51

(부활절) 주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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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12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설교>

 

◉ 복음의 핵심 ◉

 

사도 바울은 고전 15:14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라고 말합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복음은 복음이 될 수 없으며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도 헛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마음은 부활에서 멀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일 것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다기보다는 절실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이것은 부활을 복음서에 등장하는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이나 나사로처럼 죽었다가 다시 사는 환생쯤으로 여기는 잘못된 이해가 원인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부활의 상태와 실제적인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부활의 상태와 실제적인 모습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사도들도 여기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서에서 부활에 대해 증거하고 있긴 하지만 그 이유는 고린도 교회 신자들 가운데 부활을 믿지 않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는 부활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기도 하고 부활을 믿지 않고도 신앙생활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부활 신앙이 없이도 신앙생활이 가능하다는 것은 오늘날의 신앙생활과도 밀접하게 연관된 말입니다.

 

 

현대 교인들의 신앙생활의 주된 동기는 한마디로 말해서 ‘복’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기복주의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복 받는 것을 신앙의 최대의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천국이나 부활은 현재와는 거리가 먼 나중의 일일 뿐입니다. 결국 부활이 핵심으로 자리한 복음의 진정한 의미는 모른 채 몸만 교회에 담고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복신앙을 잘못되고 유치한 신앙으로 치부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좀 더 수준 높은 신앙을 추구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도덕과 윤리와 인격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어 인간의 변화로 신앙을 증거하고자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마음에도 부활 신앙은 희미하게 자리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외에도 불안과 염려를 벗어버리고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고, 아니면 외로움을 해결하고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여러 사람들과의 사귐을 목적으로 교회에 나올 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면 모태신앙이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교회를 찾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도 부활 신앙은 교리로만 자리할 뿐 사실 현실의 삶에서는 별로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세상이 원하고 추구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사건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추종했던 제자들도 부활을 원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아예 예수님의 죽음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추구했던 것이 죄에서의 건짐이나 영원한 생명이 아니라 현재 겪고 있는 고통의 삶에서의 구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물론이고 부활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부활에 마음을 두지 않은 믿음은 사도의 말대로 헛될 뿐입니다. 믿음은 영원한 생명에 뜻을 두고 있을 뿐인데 부활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는 것은 생명에 대해서 그 마음이 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현재의 삶을 위한 믿음이라는 것인데 하나님은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용도로 믿음을 주신 것이기 아니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부활의 세계를 알아야 합니다. 현재의 삶을 향한 관심을 부활의 세계로 돌려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부활이 없는 인간의 그 결국이 어떤가에 대해 생생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부활을 증언하는 자가 아니라 현재의 삶을 위해 예수를 이용하는 종교인의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마리아의 착각 ◉

 

오늘 본문에서는 막달라 마리아라는 여인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첫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며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음을 증언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마리아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기 전에는 예수님의 죽으심 때문에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던 여인이었을 뿐입니다. 부활은 전혀 예상하지 않았습니다. 도무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상식 밖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밖에서 울고 있다가 울면서 몸을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봅니다. 그런데 당연히 있어야 할 예수님의 시신은 보이지 않고 흰 옷을 입은 두 천사가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편에 앉아있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천사들은 마리아에게 왜 우는지 묻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답합니다.

 

 

마리아가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님이 서 계신 것을 보았지만 예수님인 줄을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착각하고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고 묻는 예수님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라고 말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시신이 없는 것을 누군가가 옮긴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 일을 한 사람이 동산지기가 아닌가 생각하여 옮겼거든 자기에게 말해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마리아를 향해 예수께서 ‘마리아야’라고 부르시자 마리아가 비로소 예수이신 줄을 알고 ‘랍오니’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납득이 안 되는 것은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동산지기로 착각을 했다는 점입니다. 마 16:9절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전에 예수께서 일곱 귀신을 쫓아 내어준 적이 있는 여인입니다. 그렇다면 막달라 마리아는 이미 예수님을 만난 적이 있고 따라서 예수님의 모습도 알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한 그가 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하는 점이 납득할 수 없는 내용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경험했던 것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영광스럽게 변하여서 미처 알아보지 못한 것은 아닐까요? 하지만 그런 이유라면 동산지기로 착각했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동산지기는 일반인이며 그것도 당시 사회적으로는 낮은 계층에 속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외적인 그 모습 또한 볼품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만약 예수님의 모습이 영광스럽게 변해서 알아보지 못한 것이라면 동산지기로 착각하는 일은 없었어야 하는 것이 옳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착각을 했다는 것을 보면 어쨌든 부활하신 예수님의 외적인 모습이 부활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얼굴 모습이 아예 다르게 변했기 때문일까요? 그렇다면 ‘마리아야’라는 부름 한 번에 예수님을 알아보고 ‘랍오니’라고 대답했다는 점이 또 다시 의문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얼굴은 알아보지 못했지만 목소리를 알아듣고 예수이신 줄 알았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 불러 주심 ◉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명확한 답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마리아와 동일한 차원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할 수가 없고, 성경 또한 이 같은 문제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예수께서 마리아를 불러 주심으로써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경험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부활은 예수님께서 먼저 불러 주심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을 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경험하는 것은 육안의 인식 문제를 벗어난 일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다른 세계를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도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닙니다. 결국 마리아가 예수님을 알아보고 ‘랍오니’여 하게 된 것은 예수님의 부르심으로 인해서 기존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부활의 세계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성경책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기독교의 경전으로만 보이지만 예수님의 부르심으로 다른 세계를 알게 된 신자에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다가오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성경책을 본다고 해도 예수님을 알 수 없고 아무런 경험도 할 수 없지만, 신자는 성경, 즉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에서 예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며 세상과는 다른 생명의 세계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과 함께 부활의 예수님을 경험하게 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17절)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라고 하고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고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볼 수 있을까요? 분명한 것은 마리아나 제자들과 동일한 경험을 우리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의 부활의 예수님을 보는 것은 막달라 마리아, 제자들에게 국한된 경험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내가 주를 보았다’라는 증언을 할 수 없는 것입니까? 물론 마리아가 ‘내가 주를 보았다’라고 증언한 것과 동일한 의미에서의 증언을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늘로 가시기 전의 부활의 예수님을 목격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목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목격하지 못했다고 해서 ‘내가 주를 보았다’는 증언을 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로 가신 예수님이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시고 보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하늘로 가신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셔서 보게 하시고 믿게 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늘로 가셔서 하나님과 함께 하시고 하나님 우편에서 하늘의 권세를 가지고 우리를 부르시고 믿음의 길로 가도록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인해 부활의 주께서 여전히 일하고 계심을 믿는 신자는 ‘내가 주를 보았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 주를 보았는가 ◉

 

우리가 주를 보는 것은 육신의 경험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불러 주기까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경험하지 못한 상태에 있던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여전히 죽은 존재였을 뿐입니다. 시신은 누군가가 옮겼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고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마리아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우는 것뿐이었습니다. 그것이 주를 위해 할 수 있는 마리아의 전부였습니다.

 

 

이때의 마리아는 ‘내가 주를 보았다’는 증언은 상상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내 눈에 보여야 할 시신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울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이 바로 주를 보지 못한 자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보셨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사람을 현혹하는 누군가의 말처럼 병이 낫고 귀신이 나가는 현상을 목격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체험을 하고자 하는 것은 부활의 주를 경험하지 못한 마리아가 무덤을 보며 울고 있는 것과 같은 차원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것을 믿고자 하는 사람들은 보게 되는 것이 없을 때에는 스스로 실망에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예수님을 봤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살아계시고 역사하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마리아와 같은 부활 경험은 없다 할지라도 얼마든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내 인생을 다스리며 그 뜻대로 인도하심을 믿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심으로 경험하게 되는 다른 세상입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경험하지 못한 세계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보이는 것만 보고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보고자 하는 것이 보이지 않을 때 실망하게 되고 울게 됩니다. 이것은 율법, 즉 인간의 행함을 의지하는 사람들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자신에게서 행함이 보이지 않을 때 불안해하고 실망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내가 주를 보았다’는 증언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눈으로 예수님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신자는 성령으로 인해 부활의 예수님을 경험한 다른 세계에 들어와 있습니다.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일하심과 역사를 믿는 세계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주를 믿고 있고 하늘의 생명의 세계에 소망을 두고 있는 것만으로 예수님이 나를 부르셨음을 믿으며 살아계심을 믿고 ‘내가 주를 보았다’고 증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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