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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과  범죄 이후의 인간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창 3:7)

● 지난 내용
인간이 선악과를 먹은 것은 하나님 같이 되고 싶은 욕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준 모습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어 했던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욕망은 모든 인간에게 존재합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태어났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처럼 실제로 선악과를 먹은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해도 모든 인간은 아담의 죄 속에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22절에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죽은 자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생명)을 얻을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구세주입니다.



● 오늘의 내용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그러면 선악과를 먹기 전의 인간과 먹은 후의 인간은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다시 말해서 죄를 범하기 전의 인간과 죄를 범한 후의 인간이 어떻게 달라졌느냐는 것입니다. 성격이 아주 난폭해 졌습니까? 아니면 얼굴이 흉악하게 변했습니까?


선악과를 먹기 전의 인간은 죄를 범하기 전이기 때문에 죄가 전혀 없는 상태입니다. 여러분은  죄가 전혀 없는 인간은 어떨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아주 인자한 성품을 가졌고, 어떤 경우에도 화를 내지 않고, 어려운 사람은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나쁜 짓은 전혀 하지 않는, 한마디로 법이 없어도 살 것 같은 사람으로 상상되지 않습니까? 하지만 죄가 없는 인간과 죄가 없는 인간의 차이는 인격적인 성품이나 도덕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죄를 범한 후에 인간이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성경에서 알아보겠습니다. 창세기 3:7절을 보면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후에 한 행동은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은 것입니다. 이것이 죄를 범한 후에 달라진 인간의 모습입니다.


어쩌면 조금은 이상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범했다는 것은 악해졌다는 뜻인데 악해진 인간의 행동이 겨우 벌거벗은 몸이 부끄러워서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은 것이라고 말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이 이렇게 변한 것을 싫어하셨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3:22-24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영원히 살 수 있는 생명나무를 감추어 버리시고 인간이 먹지 못하도록 막으신 것입니다.


즉 영생을 얻지 못하는 인간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영생을 얻지 못하는 인간은 결국 영원한 심판, 즉 지옥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주 무서운 벌을 내리신 것이죠.


여러분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벌거벗고 있으면 부끄러울 것입니다. 벌거벗은 몸으로 거리를 다닐 수 있겠습니까? 물론 어느 나라에 가면 남녀가 서로 벌거벗은 몸으로 피서를 하는 곳도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벌거벗은 자신의 몸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죄가 없어서 벌거벗은 몸이 부끄럽지 않은 것일까요? 또 아프리카 어느 곳에는 벌거벗은 채 살아가는 부족도 있다고 합니다. 그들 역시도 자신들이 벌거벗은 것으로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부끄러움이 전혀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만 문화와 환경에 의해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지요.


가령 어린애들은 벌거벗고 다녀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린애들에게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없는 것이 아니라 느끼지를 못하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어린애도 자라면서 부끄러움을 판단하게 되면 벌거벗은 것을 부끄럽게 여기게 됩니다.


또 남녀가 벌거벗은 몸으로 함께 피서를 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피서지라는 환경에 의한 것입니다. 그들도 피서지를 벗어나면 옷을 입게 됩니다.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이지요. 벌거벗고 살아가는 아프리카의 사람들도 도시에서 살게 되면, 벌거벗은 것을 부끄럽게 여기게 됩니다. 결국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해서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부끄러움은 있습니다. 그것이 죄를 범한 후에 달라진 인간의 모습입니다. 창세기 2:25절을 보면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죄를 범하기 전의 인간입니다. 그러한 인간이 벌거벗은 것을 부끄러워하며 무화과나무로 치마를 하여 자신을 가린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의 본래 모습을 잃어버린 것이며, 하나님이 싫어하는 인간으로 달라진 것입니다.


과연 인간이 부끄러움을 알게 된 것이 무엇이기에 하나님이 그토록 싫어하실까요? 창세기 2:17절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는 말씀을 보면, 우리가 말하는 선악과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선악을 알게 되겠죠?


창세기 3:22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보면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선악을 알게 된 아담과 하와가 한 행동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3:7절을 보면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고 말씀합니다. 즉 인간이 선악을 알게 되었기에 부끄러움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살펴 볼 때, 하나님이 싫어하신 것은 인간이 선악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부끄러움이 있는 것도 여러분이 아담의 후예로서 선악을 아는 자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선악을 안다는 것이 인류의 비극과, 불행과, 눈물의 시작이 된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된 인간은 자신의 벌거벗음을 보고 부끄러워한 것은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남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습니다. 이것이 지금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부자 앞에서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자신을 부끄러워합니다. 그리고 부자를 부러워하면서 가난한 자신의 처지를 저주하기도 하고, 불행으로 여기며, 때로는 하늘을 향해 원망을 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선악을 알게 된 인간의 삶입니다. 부자로 잘 사는 것을 선으로 여기고 가난하여 힘들게 사는 것을 악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가난한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잘 난 자식을 둔 부모 앞에서 못난 자식을 둔 부모는 자신의 자식을 부끄러워합니다. 잘 난 것이 선한 것이고, 못난 것은 악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잘났다 못났다라고 판단을 하는 것은 결국 선악을 알게 된 인간의 판단일 뿐인데, 부모는 잘난 자식은 자랑하고 못난 자식에 대해서는 실망하고 부끄러워하는 것이지요. 때문에 자식이 못나면 부모는 불행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눈물이 되기도 하지요. 이런 모든 것이 죄를 범한 인간의 달라진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벌거벗었어도 그것을 자신의 부끄러움으로 여기지 않고, 가난하고 남들보다 못났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인간으로 만드셨는데 죄로 인해서 인간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하나님이 싫어한 모습으로 달라진 인간을 새롭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가난하고 못난 것이 세상 사람이 볼 때는 부끄러운 것일 수 있습니다. 또 부자로 사는 것이 세상 사람이 볼 때는 자랑거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가난한 것이 부끄러움이 아닙니다. 부자가 자랑거리도 못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것은 모든 죄를 용서 받은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곧 영생을 얻은 것입니다. 영생은 세상을 모두 주고도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 복이며, 그러한 복을 가진 자는 제아무리 가난하고 못난 사람이라고 해도 그것을 수치로 여길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믿게 된 것으로 감사하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을 사는 것이며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20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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