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말씀안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 누리고 있습니다.
전에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지 못했을 때는 나를 환난의 수렁에서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손길만을 갈구했다면, 성령께서 내 안의
죄를 보게하시고 책망하심을 통해서는 그 징계를 통해 예수그리스도의
용서하심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지금은 환난 가운데서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긍휼을 찬양합니다.
서론이 너무 길었네요.
로마서 8장에서 육신에 속한자의 생각은 사망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법에 굴복할 수도
없다고 했는데, 여기에서 육신에 속한자는 어떠한 자인지요. 불신자 즉 세상에 속한자로 알고 있었는데요.
고전3장에서 시기하고 분쟁하는 교인들에게 육신에 속한자라 하면서 신령한 자를
대하는 것처럼 하지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를
대함과 같이 젖으로 먹인다고 했는데요
여기서의 육신에 속한자는 흔히 알고있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가는 과정에서의 신자들을 말하는 것인지요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지 않은 상태를 육신이 된 것으로 말한다면. 인간에게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할 때와 함께 하지 않을 때의 상태가 어떻게 다른가를 알아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알게 되면 자연히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지 않은 육신에 속하여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롬 8:9절을 보면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롬 8:13절에서는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의 말대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것이 육신에 속하지 않은 영의 사람으로 사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영의 사람으로 사는 것은 몸의 행실을 죽이는 자로 사는 것을 뜻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지 않은 육신으로 사는 것은 몸의 행실이 살아있는 자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몸의 행실이 살아있다는 말의 의미를 알면, 자연히 육신에 속한 자로 사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을, ‘육신의 악한 행실을 죽이는 것이 성령 받은 것이다’라는 뜻으로 말하기도 하는데 오히려 그런 생각이 몸의 행실이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몸의 악한 행실을 죽이고 대신 선한 행실이 있는 것을 믿음의 증거로 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이 몸의 행실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이점을 생각하면 교회가 주일 지키는 것, 봉사하는 것 등의 행실을 선한 행실로 구분하고 그러한 행실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으로 가르치는 것이 몸의 행실이 살아있는 상태임을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롬 8:6-8절에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육신의 생각이 사망이라는 것은 인간의 행실에 선한 것이 있고 선한 행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 곧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믿지 않는 것이기에 사망이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도 인간의 행실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무시하고 멸시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시기와 분쟁이 있었던 것도 몸의 행실에 선한 의미를 둠으로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서로의 행실, 즉 행함을 가지고 따지고 판단함으로 시기와 분쟁이 발생하는 것이고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지 않음으로 몸의 행실이 죽지 않은 상태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고전 3장의 내용은 주일오저널교를 참고하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