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21 15:36

(14강) 사탄의 계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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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후 2:10-11

고후 2:10-11http://onlycross.net/videos/co2/co2-021011.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0.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11.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설교>

성경에서 용서, 겸손, 온유 등의 단어를 접하면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이 실천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나타나야 할 중요한 덕목으로 인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신자, 겸손하지 못한 신자는 신자답지 못하다는 인식이 깊이 각인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실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예수님이 용서에 대해 가르치셨고 사도들 또한 용서, 겸손, 온유에 대한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6:14-15절을 보면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합니다.

 

 

누구든 이 말을 대하면용서를 받으려면 용서를 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이런 해석의 설교를 교회에서 흔히 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용서가 믿음의 증표, 믿음의 열매로 자리하면서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인식이 굳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자기 아들을 죽인 공산당원을 용서하고 양아들로 삼았다고 하는 손양원 목사 이야기는 좋은 예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바울도 본문에서 용서에 대한 말을 합니다. 하지만 단순히형제를 용서하라는 뜻으로 해석하기에는 어려운 내용입니다. 용서에 대한 말을 하면서도 그리스도 앞에서 하는 용서를 말하고, 다시 이어서 사탄을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말씀드린 것처럼 용서가 기독교인이 실천해야 할 덕목으로 깊이 인식되어 있는 탓인지 용서를 언급하는 바울의 의도는 무시하고 죄를 범한 자를 용서하라는 의미로 쉽게 해석하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10,11)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요? 용서하는 것이 사탄에게 속지 않는 것이라는 말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사탄의 계책은 교회로 하여금 서로 용서하지 못하게 하는 것일까요? 용서가 없는 교회가 되게 하고 다툼과 분란만 남게 하여 예수님의 용서의 은혜와 사랑이 무너지게 하는 것일까요?

 

 

이러한 해석이 그럴듯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알고 있는 지극히 상식적인 해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탄의 계책에 속지 않기 위해 신자는 서로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지만 문제는 우리에게 용서가 가능 하느냐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경을 인용하면서 용서하라고 가르치지만 실상은 교양강좌 수준에 지나지 않습니다. 용서에 간절함이 없고 그럴 능력도 없는 사람들에게 의미 없는 말일 뿐입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교회 전체를 근심하게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슨 일인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교회를 근심하게 한 일이 무엇이건 하나님이 있게 한 일이기 때문에 그 일을 통해서 무엇을 배우게 되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용서를 가르치고자 한다면 용서하라는 말로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용서다운 용서를 하는 것인지 우리가 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 여러분은 용서를 실천하지 못해도 용서가 무엇인지는 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하는 것이 용서 하는 것입니까? 용서에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존재합니다. 피해자가 가해자의 죄를 묻지 않고 처벌하지 않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적인 용서입니다. 그러면 나중에 가해자를 만났을 때도 아무렇지 않은 마음으로 편하게 그를 대할 수 있을까요? 과거에 입은 피해가 생각나면서 불편한 마음이 있게 될 것인데 그런데도 용서했다고 해야 할까요?

 

 

저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런 용서를 할 수 없습니다. 저와 복음에 대한 생각이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도 불편해 하는 제가 나에게 피해를 입힌 사람에 대해 아무렇지 않은 감정으로 만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것도 사랑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인정하겠습니다. 저는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누군가를 용서하려고 하고 사랑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여러분께도 용서와 사랑에 대한 강요를 하지 않습니다. 노력으로 가능한 일이 아닐뿐더러 그런 노력을 하게 될 때 도리어 뭔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결과에 집착을 하게 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고 사랑하려고 노력했는데 가해자는 피해자의 그런 마음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죄가 없는 것처럼 주장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그런 경우에도 용서하고 사랑하려는 마음이 지속이 될까요? 분노의 마음만 더 커질 것입니다. 반대로 가해자가 용서하려고 힘쓰는 피해자의 마음에 감동해서 고마워한다면 어떨까요? 자신을 대견스럽게 생각하며 믿음의 실천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라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탄의 계책입니다.

 

 

바울이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 말합니다. 사탄의 계책이 무엇인지를 안다는 뜻입니다. 사탄의 계책이 무엇인지 모르는 바가 아닌데 사탄에게 속으려고 하느냐는 질책입니다. 사탄의 계책을 안다면 속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알면서도 속는 것이 우리의 형편입니다. 그만큼 사탄의 계책이 우리로서는 떨쳐 버릴 수 없는 강력한 것으로 다가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탄의 계책이 무엇인지는 창세기 3장의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4,5)는 내용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탄이 여자에게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 열매의 효능에 대해 말합니다. 사탄이 말하는 열매의 효능은 하나 같이 인간에게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먹으면 죽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에게 좋은 효능이 되는 열매라는 유혹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먹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사탄의 계책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를 생각하고 자기에게 집중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집중하면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시고 예수로 말미암아 이루신 구원의 은혜와 사랑의 존귀함과 가치는 인간에게 유익을 주는 것보다 못한 것으로 취급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사탄의 계책이 목표로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으로부터 멸시 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2:2절에 보면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온전하지 못한 우리를 온전하게 하신 분이고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았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가 거룩한 자로 구원받음을 생각하면 예수님은 우리가 영원토록 바라볼 존귀한 분이라는 것은 기독교인 모두가 잘 아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 속에 또 다른 법이 있어서 나 자신에게 기쁨이 되고 만족이 되는 것을 바라봅니다. 신자가 영광 받는 것이 주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는 교묘한 말로 자기에게 마음 두고 자기를 바라보는 것을 정당화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마음 상태임을 생각한다면 자기를 바라보고 자신에게 집중한 채로 살아가는 모든 인간은 사탄의 계책에 속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용서를 했다면 그것은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이 말하는 용서가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라면 사실 바울은 용서를 말할 자격이 없다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왜냐하면 마가 요한의 일로 인해 바나바와 심하게 다툰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15장에 보면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두 번째 여행을 떠나기로 하면서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가는 문제로 의견이 충돌합니다. 마가 요한이 1차 여행 때 도중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을 두고 바울은 그런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고 바나바는 데리고 가자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바울이 요한을 용서했다면 바나바와의 다툼도 없었을 것이고 서로 갈라서는 일도 없었을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다만 사도 바울의 일이기 때문에 노골적인 비난을 못하는 것이지 심적으로는 왜 바울이 요한을 용서하지 못했을까?’라는 의문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마가 요한의 일을 생각하면 누군가의 허물과 잘못을 덮어주거나 없던 일로 여기고 넘어가는 의미의 용서는 바울의 입장에서는 말하기가 곤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도 실천하지 못한 것을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런 인본적인 용서에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인간에 의해 실천되는 그런 용서는 그리스도와 아무런 연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앞에서 용서 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먼저 모든 인간이 그리스도 앞에 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아닌 그리스도와 인간관계의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에 있게 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인간이 가해자가 되고 예수님은 피해자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앞에서 모든 인간은 가해자라는 존재로 만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앞에서는 인간관계의 높고 낮음, 행함에 따른 잘함과 못함의 관계는 형성되지도 인정되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고린도에 복음을 전한 사도이고 고린도 교회에 여러 문제가 있었다 할지라도 바울 또한 교회를 용서할 권한이나 자격을 가진 자로 교회를 대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 앞에서의 용서입니다.

 

 

바울의 용서는 인간의 성품이나 인격에 의한 얄팍한 용서가 아닙니다. 복음으로 인해 그리스도 앞에 가해자로 서게 되는 경험이 있는 신자에게만 이해되고 가능한 용서입니다. 인간의 능력이나 자질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증거 되는 용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바울이 사탄의 계책을 언급하는 것은 교회를 근심하게 한 자가 벌 받는 것이 마땅하고 벌 주는 것 또한 마땅하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앞에서 행한 것이 아니라면 사탄에게 속는 것임을 가르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근심하게 하는 자를 벌주었다면 큰 이유는 교회를 보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문제를 일으킨 한 사람 때문에 교회가 시끄러워지고 분란이 발생하는 것을 싫어하고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당사자를 벌주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라도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근심하게 하는 자의 믿음보다는 교회를 보호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앞에 서지 않고 예수가 아닌 자기 자신과 교회만 바라보는 우리의 실상입니다.

 

 

18장에 보면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23)라는 말로 시작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임금에게 빚진 만 달란트라는 어마어마한 액수의 빚을 모두 탕감해 준 것입니다.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문제는 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종이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빚을 갚지 않는다는 이유로 옥에 가둔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 주변에서 발생한 실화라면 아마 모든 사람들은 종을 비난할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비상식적인 행동을 한 종이 바로 우리라고 말한다면 인정하시겠습니까? 인정된다면 그것은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만 달란트 탕감이라는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입었으면서도 그것보다 자신의 이익에 몰두하고 살아가는 불의함을 알게 되었다는 뜻일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모든 죄가 용서되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긴바 되었습니다. 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앞에 섰을 때의 신자의 관계입니다. 우리 모두가 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자로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 날마다 생생하게 살아있어야 하는 그리스도 앞에서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를 바라보지 않고 나에게 이익이 되는 일에만 몰두합니다. 나를 지키고 이름을 높일 수 있는 것에 마음을 둡니다. 결국 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은 은혜와 사랑은 희미해지고 대신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의 허물만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마음을 두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은 것이 꾸며낸 동화가 아니라 실제로 그리스도 인해 베풀어진 현실로 다가와야 합니다. 그리스도 앞에서 용서의 은혜와 존귀함을 경험하고 부활과 생명이라는 하나의 운명으로 묶여 있는 것이 교회라는 새로운 시각이 열려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하나 된 교회이고 십자가의 용서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천국입니다.

 

 

사탄의 계책이 자기에게 집중하게 하고 자기에게 가치 있는 것을 좇게 하는 것이라면 사탄의 계책이 속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 앞에서 자기를 보는 것입니다. 용서를 실천하고 선한 일을 한다 해도 만 달란트의 빚을 갚을 수 없는 가치 없는 존재임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용서의 능력이 됩니다. 백 데나리온과 같은 인간 관계에서 발생하는 세상 문제보다는 만 달란트를 탕감 받았다는 사실에 마음을 둘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용서로 부활의 생명에 참여하게 된 것에 마음을 두는 것이 사탄에게 속지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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