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7.05.20 16:27

(3강) 완전한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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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7.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8.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설교>

사람을 가리켜 ‘결핍의 존재’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항상 자기 존재에 대해 결핍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외모, 소유, 성격이나 성품 등등에 걸쳐 결핍을 느끼며 이 결핍을 채우기 위해 행동 하게 되는데 문제는 이러한 행동이 신앙으로 위장되어 교회를 장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자기 결핍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나 방법으로 여기기 때문에 교회에서 복음이 자리하지 못하는 것이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에 대한 복음보다는 인간의 결핍을 충족시켜주는 말만 교회에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교회에서 믿음과 삶이 일치되어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들을 수 있습니다. 교회는 왜 그러한 말을 하는 것이고 기독교인들은 그 말에 전혀 의구심을 갖지 않은 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일까요? 그것은 믿음과 삶이 일치된다는 것은 성품이나 행동이 바뀌어서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그것이 기독교인다운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인은 비기독교인에 비해서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마치 하나님의 요구인 것처럼 굳게 인식되어 있기 때문에 믿음과 삶의 일치는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도 결국 기독교인이 생각하는 기독교인다움에 대한 결핍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욕구에 의한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믿음과 삶이 일치됨으로써 지금보다 더 나은 믿음과 성품과 행동을 갖춘 사람으로 나아지고자 하는 욕구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결국 자기를 향한 관심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미흡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신앙은 물론이고 성품이나 말이나 행동에 있어서 많이 미흡한 존재로 여길 것입니다. 사실 누가 자신에 대해 미흡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누군가가 스스로를 미흡하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교만하다는 질타를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나는 부족합니다’입니다.

 

 

대표 기도에서도 많이 들을 수 있는 말이 ‘부족한 저희를 용서하시고’일 것입니다. 진심으로 부족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고 말한다기보다는 자신에 대한 결핍의 욕구에 의해 나와지는 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지금보다 좀 더 나은 인간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이 담긴 말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의 세계에서 결핍을 느끼는 것이 옳은 것일까요?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가 스스로를 부족하다고 생각하면서 부족을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행동하는 것이 옳으냐는 것입니다. 먼저 단적으로 말씀드릴 것은 자기의 결핍, 즉 부족한 것을 채우고 충족시키기 위해서 평생을 노력한다 해도 자기의 힘으로 완성된 자신은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극복할 수 없는 한계입니다. 인간이 극복할 수 없는 한계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한계가 바로 죄이기 때문입니다. 극복 불가능한 죄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실상에서 부족을 메우고 완성의 상태가 된다는 것은 헛된 꿈이고 망상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과 삶이 일치되어야 한다는 말로 믿음을 실천하여 좀 더 나은 신자가 되어가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이 곧 결핍을 채우고자 하는 욕구에 의한 말이라고 진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과 삶의 일치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고린도 교회는 믿음에 있어서 실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세례의 문제로 분쟁이 발생한 것은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가?’를 기준으로 하여 세례의 가치를 높임으로써 자신 또한 가치 있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결핍이 아닌 충족의 상태를 추구하는 욕구인 것입니다.

 

 

은사로 인해 발생한 분쟁 역시 은사의 가치를 따짐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격상시키고자 하는 욕구에 의한 것입니다. 그 외에도 교회에 가득한 문제들은 고린도 교회가 믿음과 삶이 불일치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충분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고린도 교회의 문제에 대해 말하는 사도 바울은 믿음과 삶의 일치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신앙이라고도 말하지 않을뿐더러 그러한 행동을 그만두라고 촉구하지도 않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고린도 교회 문제는 이것을 염두에 두고 접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고린도 교회 문제를 왜곡하여 해석하는 잘못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8절에 보면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책망할 것이 없다면 그것은 죄가 없다는 뜻일 것입니다. 즉 완전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말을 문제 많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문제없는 교회가 되게 해서 그리스도의 날이 책망할 것이 없는 완전한 존재로 견고하게 하겠다는 뜻일까요?

 

 

골 1:21-23절에 보면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고 말합니다.

 

 

골로새 교회에 대한 바울의 선언처럼 우리는 악한 행실로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이미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에 있게 된 것이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서게 된 근거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가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서게 된 것은 전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입니다. 즉 우리의 행함이나 실천, 신앙의 공적이나 성품 등등의 어떤 것과도 연관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해는 근본적으로 죄의 극복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화해는 인간의 종교적인 노력과 실천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 증거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과 생명의 세계에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들어가심으로 하나님과의 화해가 예수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십자가의 세계임이 증거된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화해가 우리의 종교적인 노력이나 열심, 실천 등으로 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만 된 일임을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원수 되어 죄의 형벌인 죽음에 갇힌 우리가 죄가 극복된 자로 하나님과 화해된 관계에서 생명에 이르게 된 유일한 길이 십자가라는 사실은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의 종교적인 노력과 열심 모든 것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기독교 복음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심적인 내용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내용을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십니다. 제가 묻고자 하는 것은 이 내용이 여러분을 어떤 생각의 사람이 되게 하고 어떤 삶으로 나타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해되었다는 것은 모든 죄가 용서되었음을 뜻합니다. 이것이 죄의 극복입니다. 우리가 죄를 이겨서 죄의 영향에서 벗어나고 죄 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우리의 한계는 동일하지만 모든 죄가 용서 되었다는 그 선언이 십자가의 화해로 가능해진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하게 하고 죽음이 없는 부활의 세계에 속한 자가 되게 했습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의 삶에 어떤 능력으로 자리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은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은 십자가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안의 세계, 즉 예수 그리스도 안의 세계가 책망할 것이 없는, 부족함이 없는 완전과 충만의 상태로 존재하게 하는 신비입니다.

 

 

그러므로 완전한 세계인 십자가는 인간의 종교적 실천, 행위가 공로나 의로 자리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오직 예수님의 행하심만 의의 능력으로 견고하게 자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가 말씀의 실천을 강조하며 인간의 열심과 행함을 믿음의 증거로 말하는 것은 견고한 의의 능력인 십자가를 흔들고자하는 것일 뿐입니다.

 

 

십자가는 사랑의 세계입니다. 원수 된 관계를 화해의 관계가 되게 하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시고 십자가의 저주를 홀로 담당하게 하셔서 이루신 화해가 곧 사랑으로 견고하게 자리한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완전한 나라인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십자가를 믿는 것은 완전한 세계를 사는 것이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완전한 세계에서 불완전하고 부족한 존재로 사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존재 그 자체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립되어 있지 않으면 예수를 믿는 신자면서도 예수의 세계에 대해서는 무지한 채 예수 밖의 삶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할 뿐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늘 ‘나는 부족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스스로를 채우고 충족시켜 가는 것을 신앙으로 오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을 신자 스스로도 실감하지 못하고 미심쩍어 합니다. 스스로를 완전하다고 말할 수 없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완전하지 못하고 부족한 것 밖에 없기 때문에 ‘완전한 존재’라는 말이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결국 이로 인해서 완전한 세계인 십자가에서 벗어나 자신의 열심과 노력에 따라 인정받는 종교 세계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골 3:14절에서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말한 ‘이 모든 것’은 골 3:12,13절에서 언급되는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용서 등입니다. 바울은 이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사랑을 더해야 온전한 행함이 된다는 뜻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사랑을 더하라고 하는 것은 신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에 의지하고자 하는 것이 곧 완전의 나라를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의지하는 신자는 그리스도의 날에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책망할 것이 없는 완전한 자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완전한 나라인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사람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신비이고 비밀입니다. 이 비밀을 알게 되면 자신에 대해 결핍을 느끼는 것이 곧 그리스도로 사는 삶이 아님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결국 믿음과 삶의 일치를 주장한다면 그것은 성경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의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족한 것을 채우며 완전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완전한 세계에 들어와 있습니다. ‘나’라는 존재는 항상 죄를 드러내며 살아가지만, 그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하나님과 화목의 관계에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흔들리지 않고 견고합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에게서 드러나는 죄를 보면서 자기에 대해 실망하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에 존재할 자격이 없음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의 피로써 되어진 새로운 자기 존재에 눈을 뜰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에 능력으로 자리한다면 자신이 행동하는 것을 기준하여 타인과 차별하는 방향으로는 나아가지 않게 됩니다.

 

 

성경을 많이 알든, 복음을 많이 알든 그것은 남보다 더 낫다는 기준도 증거도 되지 못합니다. 적어도 신자가 십자가의 세계를 이해하고 그리스도안의 세계가 무엇인가를 안다면 많이 알고 많이 행한 것으로 더 나은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님을 모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앎이 삶의 능력으로 자리한다면 자신의 어떤 것도 차별로 나아가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것이 말씀에 의해서 말씀의 세계를 살아가는 것이고, 또 다른 의미에서 본다면 말씀의 실천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의지와 행동에 의한 실천이 아니라 말씀의 능력에 의해 살게 되는 것으로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완전한 나라이며 우리는 그의 나라의 백성입니다. 완전한 나라의 완전한 백성입니다. 내가 완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완전하심 안에서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자로 인정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날까지 흔들리지 않고 견고합니다.

 

 

이런 점에서 고린도 교회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세계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가 누구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무엇이며 그리스도가 이루신 십자가의 세계가 무엇인가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알게 되면 자연히 자기의 잘못됨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기독교에서 나타난 큰 문제도 고린도 교회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나타난 현상, 은사에 관심이 기울면서 방언을 하고 병 고침이 있는 것을 믿음의 증거로 간주합니다. 자연히 방언 못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고 성령 받지 못한 것으로 치부되면서 차별이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완전의 세계를 누리지 못하는 결과입니다.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닙니다. 자신에 대해 전혀 무관심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또 자신에 대해 무관심할 사람도 없습니다. 다만 자신의 기준으로 스스로를 차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그는 이미 완전의 나라에 들어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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