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7.06.17 16:06

(7강) 전도의 미련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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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9.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설교>

고린도 교회의 문제 중의 하나로 등장한 분쟁과 분파는 오늘 우리의 현재적 문제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인간이 존재하는 곳에 분쟁과 분파는 필연적이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분쟁과 분파는 인간에게서는 제거될 수 없는 본성적 문제로 인식해야 합니다.

 

 

이런 말에 대해 ‘그러면 분쟁과 분파는 인간에게 당연한 것이니까 마음대로 분쟁하고 분파를 이루어도 된다는 말인가?’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해결책은 제시하지 못합니다. ‘분쟁과 분파는 신자답지 않은 행동이니까 기도하면서 분쟁과 분파가 발생하지 않도록 힘씁시다’라고 촉구하는 말을 하는 것이 전부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또한 실현 가능성도 실천 가능성도 없는 공허한 말일 뿐입니다.

 

 

저녁에 높은 산에 올라가서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면 빨간 빛의 십자가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는 한 건물에 두 개, 세 개의 십자가가 세워져 있는 것은 흔한 풍경이 되었고 심지어 네 개의 십자가가 세워져 있는 곳도 있다고 합니다.

 

 

이들 교회가 서로에게 한 분 하나님을 믿는 형제일까요? 형제는커녕 경쟁관계에 있을 뿐입니다. 심한 말로 표현하자면 동종업계의 경쟁관계인 것입니다. 이것이 분쟁이고 분파입니다. 다시 말해서 분쟁과 분파는 어느 개 교회의 문제만이 아니라 기독교의 문제, 나아가서 인간의 문제로 자리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분쟁과 분파를 십자가의 의미로 접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 되게 하셨다면 중요한 것은 피의 은혜이지 내가 가치 있는 영광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기에 대한 관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세례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에게만 관심을 둠으로써 세례 베푼 자에게 초점을 두고 그것으로 세례를 차별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것임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바울은 십자가가 무엇인가를 증거 합니다. 구원 받은 자는 십자가의 도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여김으로써 인간의 능력이나 힘은 가치가 없고 헛된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따라서 고린도 교회가 차별의 시각으로 바라보았던 바울, 아볼로, 베드로 그들의 능력이나 힘도 구원에 있어서는 무가치할 뿐입니다. 때문에 구원의 은혜 안에 있는 신자는 자연히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미련한 것이고 어리석은 것일 뿐입니다. 십자가에는 자신이 대접받고 인정되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믿는다 해서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그야말로 무능만을 드러낸 채 죽임을 당한 예수만 생각하며 그 길을 좇는다는 것은 자신에게 득이 되지 않은 것으로 보였을 뿐입니다, 이들에게 십자가의 도는 미련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주지해야 하는 것은 신자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상관없이 자기 힘으로 신자 되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능력에 자신의 힘을 추가하여 신자 되는 것은 없습니다. 또한 자기 힘으로 타인을 신자 되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 받는 신자는 십자가의 도를 믿게 된 것을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의미와 존귀함을 알고 믿는다면 신자는 기쁨을 자기 욕망을 채우는 것이 아닌 존재됨에서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가 있는 신자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로 사는 것은 특별한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채우기 위해 사는 것이 기쁨도 행복도 아님을 알고 십자가에서 기쁨을 찾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9,20절을 보면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라고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는 세상의 지혜로는 알 수 없습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세우신 십자가라는 구원 방식은 인간에게는 걸림돌로 작용하게 됩니다.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존재 가치를 향상시키기 위해 힘쓰는데 십자가는 사람의 존재 가치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인간에게 걸림돌로 작용하게 하게 하신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미련한 것으로 보이게 하심으로 인간이 스스로 십자가를 선택하고 믿음으로 구원 받게 되는 것을 차단하신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십자가의 도는 인간에게는 환영받을 수 없는 것이고 누구도 환영하지 않을 십자가를 믿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 가치가 아니라 십자가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믿음은 자기의 믿음을 부인하게 합니다. 이것으로 그가 믿음에 있는지 믿음에 있지 않은 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믿음에 있지 않게 되면 자신의 믿음에 관심을 둡니다. 그럴듯한 믿음의 행위를 통해서 믿음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가 아니라 바울, 아볼로, 베드로와 같은 사람을 보게 되는 것이고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을 높임으로 자신의 이름 또한 높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분쟁이고 분파이며 바울은 그 이유를 십자가 앞에서 인간의 존재성을 알지 못한 어리석음으로 여기고 십자가가 무엇인가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21절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단호하게 말하는 것은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은 자기 지혜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모든 것을 알 수 없습니다. 도대체 십자가를 아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문제이기에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일까요? 인간의 지식으로는 알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지식을 담고 있는 것이 십자가라는 뜻일까요?

 

 

사람이 추구하는 것은 자기 몸입니다. 믿음도 자기 몸을 위해 이용합니다. 당연히 신을 찾는 것도 자기 몸을 위해서입니다. 이처럼 자기 몸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에 의해 예수님이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인간의 죄를 드러내는 생생한 현장이 됩니다. 하지만 인간은 십자가에서 자기 구원만 생각할 뿐 자신의 죄는 보지 못합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알지 못한 것입니다.

 

 

물론 십자가를 예수님이 자신이 죄를 대신해 죽으신 것으로 말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대신 죽으셔서 죄가 용서되고 구원 되었다는 것에 초점을 둘 뿐이지 죄인이라는 자기 존재에는 깜깜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치명적인 문제인 것이고 이러한 사고방식에서의 십자가는 예수님이 피 흘리신 십자가라 할 수 없기에 결국 십자가를 모르는 것으로 규정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는 전도를 미련한 것으로 말합니다. 전도를 사람에게 예수를 알려서 예수를 믿게 함으로 천국가게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참된 전도는 미련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십자가는 인간의 본성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전도는 인간을 설득하는 것도 이해시키는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의 도는 설득과 이해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성령의 개입에 의해서만 알게 되고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일하심에 굴복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도를 인간이 인간에게 복음을 전해서 믿게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해되지 않을 말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도 전도를 했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바울에게 설득을 당하여 십자가를 믿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 역시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성도되었기 때문에 사람과는 무관하며 따라서 바울에게 속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사람이 누군가가 설득한다고 해서 자기 몸을 위해 사는 삶을 포기할까요?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한 삶을 포기할까요? 이것은 본성을 거스르는 일인데,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 설득으로 가능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설득으로 가능하다면 하나님은 구원을 위해 말 잘하는 달변가들만 골라서 전도사로 세우셨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설득당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말씀에 설득되었다면 예수님이 죽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유대인의 사이에는 오직 충돌만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유대인의 사고와 부딪힌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전했을 때 필히 나타나는 현상은 충돌이지 설득도 이해도 아닌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의 전도에 설득이 되어 예수를 믿는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참된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복음은 설득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충돌이 있게 함으로써 세상은 여전히 복음을 거부한다는 것을 증거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지혜나 재주나 실력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복음의 일에 있어서 인간으로 되어진 것은 없으며 따라서 인간이 자랑되거나 높임을 받아야 할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도 아볼로도 베드로도 고린도 교회가 추종할 대상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사람을 중심으로 분쟁이 발생하고 분파가 있게 되는 것은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는다는 증거가 됩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존귀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중심이 된 분파와 분쟁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분쟁과 분파는 십자가를 말하되 십자가의 은혜에서는 벗어나 있는 우리의 실상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지혜는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이 예수 믿게 해서 천국가게 할까?’로 집중하게 됩니다. 때문에 복음에서 걸림돌이 될 요소를 제거하게 됩니다. 복음이 걸림돌이 된다면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믿을 수 있도록 걸림돌을 제거하고 대신 사람이 추구하고 기뻐할 것으로 대체해 버립니다. 이것이 가짜 복음이며 지혜가 아닌 미련한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는 인간을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움직임은 자기 유익으로 향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인간의 지혜에 하나님의 영광은 전혀 고려되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지만 그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빙자한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우월한 위치에 있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은 결국 자신의 우월로 드러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십자가의 도는 인간에게 전혀 효율적이지 못합니다. 인간을 우월한 존재로 높이지도 않고 인간의 욕망을 채우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거부하고 꺼려하는 길로 끌어갑니다. 그런데 거기에만 생명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인간이 자기 지혜로 선택할 수 없게 하시고 좇을 수 없도록 막으시면서 하나님이 택하시고 성령으로 붙든 백성들만 가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행하심을 높이고 찬송하게 하심으로 영광 받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인 것입니다.

 

 

이것을 전하는 것이 전도이기 때문에 전도는 우리의 힘으로는 가능하지 않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만 가능하기 때문에 우리가 성도 된 것, 예수님을 알게 되고 구원자로 믿게 된 것, 십자가의 은혜를 의지하게 된 것 그 모든 것에 인간의 공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공로를 주장하는 그것이 곧 멸망의 모습이라는 사실이 십자가로 증거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전도는 누군가를 예수 믿게 해서 구원 받게 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인간의 무능을 알게 하고 하나님의 능력만 의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도를 사람들은 거부합니다. 그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환영하지 않을 방식의 전도라는 것입니다.

 

 

애당초 하나님은 사람에게 환영받고자 하는 뜻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하고 거부할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일하심으로써 세상의 미련함을 드러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방식에 굴복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성령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에 ‘누가 성령 받은 자인가?’도 이러한 기준에서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20절을 보면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지혜 총명은 십자가 앞에서 쓸모없는 것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세계에서는 지혜자, 변론가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 구원 받을 죄인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참된 지혜입니다.

 

 

지금까지 드린 말씀은 인간의 지혜와 총명으로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 말라고 해도 인간은 자기도 모르게 자기 총명과 지혜를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자신의 실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드러날 때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는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말씀이 내게 주어질 때 말씀에 의해서 자신을 보게 되는 것도 은혜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은 물론이고 사람을 우월한 존재로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은혜만 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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