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7.07.15 16:07

(11강) 하나님의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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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4.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설교>

신자는 자기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모든 가능성이 자기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즉 인간의 모든 능력과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참된 의미입니다. 따라서 ‘믿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로 믿음을 빙자하여 인간의 능력과 가능성을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의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능력을 크게 오해하고 있다는 점을 자주 언급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능력 있는 사람이 되게 하여 믿음이 없는 사람이 할 수 없는 모든 일을 하게 한다는 의미로 믿는 것이 능력에 대한 오해인 것입니다.

 

 

물론 믿음이 있는 신자에게서만 드러나게 되는 것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온전히 믿음에 의한 믿음의 능력이지 믿음의 능력이 신자에게 전가되어 신자가 능력을 행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기독교인은 믿음의 능력을 그러한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능력을 달라고 소리치고 애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능력 있는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은 욕망입니다.

 

 

요 15:5절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구절을 보면 대개는 ‘우리가 예수 안에 거하자’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과연 자신의 의지와 실천으로 예수 안에 거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 안에 거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는 아십니까?

 

 

예수의 세계는 곧 용서의 능력이 함께 하는 세계입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용서가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증거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안은 인간이 자신의 선함과 실천으로 용서를 받고 사랑을 받고 복을 받고자 하는 모든 뜻이 버려진 세계입니다. 인간이 과연 이러한 예수 안의 세계를 원할까요?

 

 

인간이 원하는 것은 자신이 행하고 실천함으로써 이룬 공로와 업적만큼 대접받고 보상받는 신앙의 세계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 예수 안에 거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인간을 장악하고 있는 욕망이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 안의 세계를 탐탁지 않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예수 안에 거하고 있다는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심으로 이루어진 용서의 능력이 나를 깨끗케 하였음을 믿는 것이고 이 믿음에 의해서 자신의 선함과 실천의 공로와 모든 업적을 가치 없는 것으로 인정하게 되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능력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합니까?

 

 

요 15:6절에서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은 본래 예수 밖에 버려진 존재입니다. 그래서 불에 던져질 운명일 뿐입니다. 그런 우리를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를 선택하심으로 우리가 주의 소유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이유입니다. 나의 뜻이 아니라 주의 뜻에 의한 기도라는 의미고 그래서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시는 것입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4,5절)는 본문의 내용을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바울은 고린도 교회로 하여금, 그리고 오늘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알게 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바울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되는 일을 사람의 능력으로 된 것처럼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전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용서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나 자기중심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인간은 용서의 능력에 의해서 자기가 부인되어지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용서의 능력에 의한 자신의 죄사함과 구원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그래서 아무런 갈등도 없이 용서의 능력을 믿는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즉 ‘나 구원 받았다’는 의미로 ‘주님의 용서를 믿습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가 부인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 가운데서 믿음을 생각하기에 ‘용서를 믿습니다’고 하면서도 십자가도 용서도 자신이 믿는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을 자기 것으로 가로채는 것이 되는 것이 십자가를 헛되이 하는 것이 될 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인간의 의지나 결단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본성적으로 인간은 자기 행함의 가능성과 가치를 포기하는 것을 싫어하는 족속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본성에 의해서 자기 믿음을 타인과 비교하고 자랑하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노출시키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 믿음을 자랑하고자 하는 것이 참된 믿음에 대한 앎이 있는 신자에게는 믿음 아닌 것을 노출시키는 것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여러분께는 구원의 기쁨이 있습니까? 제가 말씀드리는 구원의 기쁨은 ‘나 구원 받았다’‘나 천국 간다’는 것으로 인한 막연한 기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의 기독교인들에게 구원의 기쁨은 그러한 의미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자신이 구원 받고 죽은 후에 천국 가게 되는 것으로 기뻐하는 것을 구원의 기쁨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 천국 간다’는 것이 진정한 기쁨으로 자리한다면 그 사람에게 세상은 하루 속히 떠나고 싶은 곳이어야 합니다. 세상을 사는 것보다 천국에 있게 되는 것이 더 큰 기쁨으로 자리한다면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기독교인들에게 천국은 단지 죽음 이후에 좋은 곳으로 들어가는 정도로만 여겨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존해 있는 동안에는 세상만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천국이 기쁨으로 머문다면 그 기쁨에 의해서 세상은 가치 없는 것으로 보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세상이 가치 없는 것으로 보이기에 타인보다 적은 것이 주어진다 해도 낙심하고 불평하지 않는 것이고 그 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하게 되는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능력 가운데 살아가는지를 바울은 묻는 것입니다.

 

 

바울의 물음을 근거로 해서 저 또한 여러분께 묻고 싶은 것은‘하나님의 능력에 붙들려 본 경험이 있는가?’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다면 이런 물음에 대해 답하기가 곤란해집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물리적인 어떤 힘, 또는 유대인들이 추구했던 표적을 경험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아마 자신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능력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다면 하나님의 능력을 매일의 현실로 바라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매일 경험하고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느 한순간도 자신의 육신의 힘으로 산 적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숨을 쉬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능력임을 알게 되고 무엇보다 예수의 피로써 용서되고 깨끗하게 되었음을 믿게 된 것이 하나님의 능력임을 알았을 때 하나님의 능력에서 벗어나 자신의 힘으로 살아본 적이 없음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되면 그 믿음은 당연히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되지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위대한 일을 했다 해도 그 사람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생각할 뿐 사람을 바라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을 무시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고린도 교회처럼 사람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고 사람을 두고 서로 비교하면서 분파로 나눠지게 될 때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에 있지 않고 사람의 지혜에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스스로를 통찰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능력에 붙들려 있는 것이 참된 현실임을 알게 된다면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음을 자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능력으로 도와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는 나의 능력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를 고치고 변화해서 좀 더 신자다운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들이 실상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는 것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능력을 말하면서도 사람의 능력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은 줄을 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느 한쪽으로도 넘어지고 싶지 않고 넘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혀 본 경험이 있는가?’를 물은 것입니다. 경험이 있다면 주저 없이 사람의 능력은 부인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이 현실임을 고백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너무 복잡하게 설명하는 것 같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을 믿고 열심히 교회 생활하고 선한 일을 하면서 살아가면 안되는가? 그것이 하나님의 뜻 아닌가?’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순전히 우리들 생각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은 배재한 채 우리의 입장에서만 생각한 것이고 하나님의 뜻도 우리 마음대로 인간의 편리를 따라 변개한 것일 뿐입니다. 결국 우리 생각에는 옳고 정당한 일이 하나님의 생각에는 십자가를 훼방하고 허무는 멸망의 일이 되는 심각성이 있기에 성경을 따라 세세히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분명히 인식하셔야 하는 것은 믿음의 실천으로 생각하는 ‘열심 있는 교회 생활’‘선한 일’이것이 정작 믿음과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믿음으로 사는 것으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예수 안의 믿음의 세계는 우리가 본성으로 아는 믿음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종말론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것이 종말론적 사건이기에 십자가를 믿는 것은 당연히 종말론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을 종말론적이 아닌 현재적인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현재의 삶의 평안과 필요한 것을 얻고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식하는 것이고 ‘잘 믿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는 것입니다. 잘 믿어야 하는 것을 자신의 할 일, 책임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믿음이 사람에게 있는 것이 됩니다.

 

 

바울은 롬 1:17절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말합니다.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것은 복음이 증거 하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지금은 드러나지 않고 가려져 있습니다. 의가 드러나는 것은 종말입니다. 종말에 가서 십자가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하여 하나님의 의가 함께 하는 백성이 되었다는 것의 영광과 복이 어떤 것인지가 사실적으로 선명하게 드러나게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은 바로 종말에 드러날 그 모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믿음을 종말론적이라고 하는 것이고 이 믿음은 인간의 능력과는 절대적으로 무관하기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이 현재적인가 종말론적인가로 사람의 지혜에 있는 믿음인가 하나님의 능력에 있는 믿음인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분별을 무시한 채 믿음을 말한다면 지금의 기독교처럼 세상의 종말, 예수의 재림, 천국에 대한 소망을 말하면서도 현재의 평안과 복 또한 포기하지 않는 믿음의 옷만 걸치고 있는 위선에만 머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병을 치유하고 신비한 경험을 하고 복을 받고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의도로 하나님의 능력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진심으로 신자답게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그나마 건전한 편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자에 비해서 건전하다는 것이지 복음적인 것은 아닙니다.

 

 

건전한 것과 복음은 다릅니다. 건전하다는 것은 기독교 양심을 기준으로 했을 때 바르게 행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양심을 복음으로 사는 것으로 간주할 수는 없습니다. 기독교 양심대로 산다고 해서 그것이 의가 되고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복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에 기독교 양심을 복음으로 오해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가 중요하다는 것을 그토록 강조 드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 말하는 것도 그것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어 있기에 분쟁과 분파가 있으면서도 여전히 자신들이 예수를 믿고 복음을 안다고 생각하는 착각을 깨뜨리고자 십자가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의해서 사람의 능력과 모든 가능성이 깨어지고, 그것으로 온전히 하나님의 능력만 드러나고 그 능력만 고백하고 의지하는 자가 신자라는 사실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되고자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무엇이라도 되고자 한다면 필연코 자신의 힘의 부족과 한계를 느낄 것이고 그것을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 채우려고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능력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것이기에 결국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이 아닌 사람에게 있는 결과가 될 뿐입니다. 사람의 능력이 세상에서 공로와 업적으로 드러나고 영광으로 이어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종말의 영광과 생명과는 무관합니다. 그래서 신자는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에만 있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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