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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갈 2:11-14

갈 2:11-14http://onlycross.net/videos/gal/gal-021114.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1.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12.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4.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설교>

사도인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고(고전 2:2),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6:14). 우리는 바울이 자신의 말대로 오직 십자가가 중심이고 전부인 삶을 살았다고 인정합니다. 성경에서 알 수 있는 바울의 삶은 사도로 많은 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한 것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바울의 믿음을 본받아야 하는 것으로 높입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더러 바울처럼 살라고 한다면 난감해할 것입니다. 바울처럼 살려면 일상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우리의 삶은 바울과 다릅니다. 바울은 결혼을 하지 않아 가정이 없습니다. 생계를 위해 한 일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천막을 만드는 것입니다. 만약 결혼하여 가족이 있고 그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면 그 일만으로 생활할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결혼을 했고 가정이 있습니다. 나 혼자 살면 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을 책임져야 합니다. 단지 먹고 살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를 잘 가르쳐야 하고 누구나 추구하는 행복한 인생을 위해 필요한 것 또한 많습니다. 이러한 삶을 위해 사람들은 자기 일을 열심히 하며 노력합니다. 이러한 일상을 포기할 생각이 없기에 비록 바울의 믿음을 본받아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긴 하지만 바울처럼 사는 것에는 마음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혼하지 않고 혼자 지낸다 해도 다르지 않습니다. 가정이 있는 것보다 부담이 적을 수는 있지만, 행복을 추구하고 그 조건을 성취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은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세상에서의 일상이며 이것 말고 다른 일상을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바울처럼 인생의 전부를 복음만 전하며 살려는 의도는 없는 것입니다. 다만 현재의 삶의 질이 좀 더 나아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육신의 일에 마음이 집중되어 있고 육신으로 육신을 위해 삽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일상을 들여다보면 믿지 않는 사람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생활을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민이고 딜레마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신자라 해도 도무지 믿지 않는 사람과 일상에 차이가 없는데 십자가를 믿는 믿음이 일상에서 어떻게 드러나야 하는가의 문제입니다.

 

 

대개의 기독교인은 이 차이가 윤리와 도덕의 실천, 즉 선한 생활로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선한 생활은 기독교인에게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신자에게 일상은 무엇이고 믿음은 일상에서 어떻게 나타나게 될까요? 분명한 것은 믿음과 일상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일상도 믿음의 간섭 아래 있기에 믿음이 우리의 일상에서 어떻게 나타나게 되는가에 대한 고민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갈라디아서를 보게 되면 율법과 십자가라는 단어를 많이 듣게 됩니다. 그러면 이 단어가 지금의 여러분 일상에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일상과는 무관한 단어일 것입니다. 그 말은 일상을 살면서 율법과 십자가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 경험을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대다수 기독교인의 일반적인 생활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교회라는 범위로 국한되는 것이고 교회 밖으로 넓힌다 해도 선한 행실과 실천을 뛰어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본문의 내용도 우리의 일상과는 무관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바울이 게바를 책망한 이 일이 우리의 일상에서 일어나고 경험하게 될 문제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말씀드린 것처럼 일상 또한 믿음이 간섭하고 다스리는 현장임을 생각하면 본문도 일상에서 생생하게 경험되어야 하는 문제로 바라봐야 합니다.

 

 

11절에 보면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라고 말합니다. 안디옥에서 바울이 베드로라고 하는 게바를 책망하게 된 사건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건의 내용은 12,13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안디옥을 방문한 게바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먹고 있을 때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오는 것을 보고 그 자리를 떠납니다. 12절을 보면 이들을 야고보에게서 온 것으로 말하는데 이것은 야고보가 중심이 된 예루살렘 교회가 보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게바가 그들이 오는 것을 보고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함께 먹고 있던 자리를 떠난 것이고, 게바를 따라 그 자리에 함께하고 있던 다른 유대인과 바나바도 그 자리를 떠났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외식에 유혹된 위선으로 보고 책망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이 우리로서는 사실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게바는 복음을 알고 전하는 사도로 자신이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함께 먹는 것이 복음에 어긋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 자리에 함께하고 있던 다른 유대인이나 바나바도 다르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잘못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는데도 예루살렘 교회에서 온 할례자들이 두려워 자리를 떠났다는 것이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10:28-29절에 보면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가서 자신이 환상 중에 경험했던 하늘에서 내려온 속되고 깨끗하지 않은 것이 담긴 그릇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게바, 즉 베드로는 이미 하나님이 경험하게 하신 일을 통해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10:34,35).

 

 

또한 행 11장에 보면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할례자들로부터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며 비난을 받는 일이 있습니다.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을 것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일에 대해 자신이 환상으로 경험한 것과 고넬료의 집에 가게 된 경위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베드로가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11:17)고 말하자 베드로를 비난했던 사람들이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게바는 이미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함께하고 그로 인해 비난을 받고 해결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런 게바가 안디옥에서는 할례자들을 두려워하고 이방인과 함께 먹던 자리를 떠나 물러갔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그릇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할례자와 무할례자를 차별하여 대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받는 것에도 차별이 없음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경험하고 깨닫고 알게 된 것을 토대로 할례자들을 의식하지 않고 그냥 이방인과 함께한 자리에 계속 있어도 되는 것 아닐까요? 이것이 우리의 생각이고 게바의 행동에 대한 의문이기도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게바와 같은 상황에 있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 것 같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게바와 같은 상황에 직접 있지 않고는 누구도 알 수 없는 문제입니다. 게바처럼 그 자리를 떠났을 수 있고 아니면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리를 떠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생각해야 하는 것은 그러한 행동으로 믿음의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우리의 실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를 믿을 수 없고 주께 마음을 두지 않을 악한 인간을 붙드시고 다스리며 주께로 끌어가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믿음과 일치된 행동을 하는 것으로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게바와 같은 행동이 믿음이 없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복음을 알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인 게바를 믿음 없다고 판단할 수 없다는 것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남은 유대인과 바나바까지 게바를 따라 자리를 떠났다는 것은 그들 역시 바울의 책망 아래 있다는 뜻이 됩니다.

 

 

바울은 14절에서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게바의 행동을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않은 것으로 말합니다. 그러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는 것을 할례자가 온다 해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까요? 하지만 그것은 이방인과 함께 먹는 자리를 떠나고 떠나지 않는 것으로 바른 행함의 여부가 판단되는 결과가 됩니다.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바울이 말하는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않는 것의 의미입니다.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하던 자리를 떠난 것은 할례자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과 함께한다는 비난과 정죄가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를 떠나므로 비난과 정죄를 피하고자 한 것인데 그것이 자신을 모든 정죄에서 벗어나게 한 복음을 따르지 않는 것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않은 것입니다.

 

 

게바는 할례자들이 두려워 떠났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할례자는 예수를 믿지 않은 유대인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동료들입니다. 그런 그들을 두려워한 것은 이방인과 함께 먹는 자신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에서의 자기 위치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또한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않은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 세상에서의 나의 위치라는 것은 아무 쓸모가 없는 헛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게바의 행동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보여줍니다.

 

 

바울이 게바를 책망하는 것은 바울의 믿음이 게바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우월한 사도가 자기보다 더 열등한 믿음을 가진 사도를 책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책망은 게바의 행동이 바울이 예수님에게 받은 계시와 맞지 않기 때문에나는 너의 행동에 반대한다는 의미로 책망하는 것입니다. 계시에 근거한 책망입니다. 따라서누군가의 잘못된 행동을 보게 되면 책망하여 행동을 고치게 해야 한다는 의미로 본문을 받아들이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의 일상을 생각해 보십시오. 복음을 따라 바르게 행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런 물음에 답하기가 곤란할 것입니다. 일상에서 복음을 따라 바르게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아는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일상에서 어느 한 부분을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는 것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일상은 나를 중심으로 나를 위해 흘러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일상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실패자라는 사실만 명확하게 다가오게 됩니다. 선한 일상은 없습니다. 일상 자체가 우리의 믿음 없음을 드러내는 현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능력은 오직 주께 있음을 알게 된 그 믿음으로 교회로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게 되는 율법과 십자가입니다.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은 예루살렘 교회가 기둥같이 여기는 사도였습니다. 하지만 게바가 바울에게 복음의 진리를 따라 행하지 않았다는 책망을 받습니다. 복음의 진리 문제에서 실패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게바 개인의 믿음 문제로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유력한 자로 높이고 기둥같이 여기는 자라 할지라도 복음의 진리에 대해서는 결국 실패자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유력하고 기둥같이 여기는 사도가 있다는 것은 자신들의 기준으로 사도를 비교하고 신자를 판단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였습니다. 모든 인간을 실패자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도 선한 행실과 외적 조건을 따져 실패자가 아닌 믿음 있는 자로 생각한다는 것이며 그것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행하지 않는 것으로 규정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을 따라 행한다면 나에게서 선하고 바른 것이 보이게 됩니다. 율법의 시각에서는 교회 생활이나 도덕적으로 선한 행실 등이 자신의 신자다움을 보여주는 증거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좀 더 선하고 바른 것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채우면서 좀 더 나아진 신자다움을 갖추려고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처럼 행하지 않은 사람에 관한 판단을 낳게 됩니다. 이것이 유대인같이 유대인의 흉내를 내는 것입니다.

 

 

바울은 게바에게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이방인을 억지로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고 책망합니다. 게바는 유대인이지만 복음을 알았기에 율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율법 없는 이방인을 억지로 율법 안으로 끌어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게바가 할례자를 의식하고 자리를 떠난 것이 이방인으로 하여금 율법을 따르지 않는 자신들의 믿음이 잘못된 것으로 알게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게바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율법을 받지 않은 이방인이지만 성향은 늘 율법을 받은 유대인같이 사는 것을 추구합니다. 바른 삶, 말씀의 실천을 생각에서 떨쳐 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진리가 우리에게 알게 하는 것은 구원에 대해 실패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상에서 확인하면서 복음의 진리를 따라 실패자의 자리에서 주를 생각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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