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4:21http://onlycross.net/videos/gal/gal-0421.mp4
<본문>
21.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설교>
예수님의 세계는 용서와 자비의 세계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로 완성된 구원의 세계입니다. 이 세계에는 정죄가 없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라는 말로 확고히 증거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정죄함이 없는 예수님의 세계를 믿지 않습니다. 죄지은 자를 예수의 피로 용서받았다고 하면서 죄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죄에 대해 담대해질 것이고 죄를 지으면서도 자신의 잘못에 둔해짐으로써 무질서하게 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정죄하지 않는 것은 선악과를 먹은 죄에 국한된 것이고, 세상을 살면서 지은 죄는 회개를 해야 한다는 조건을 붙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요일 3:8-9절에 보면“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라고 말합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면 죄로 인해 회개한다 해도 그는 마귀에게 속한 자라는 뜻이 됩니다. 회개를 하는 것은 죄를 지었다는 뜻이고 그것은 곧 마귀에게 속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없다’라고 말해야 하는 걸까요?
교회가 믿음에 율법을 더하는 것은 말씀을 실천하는 선한 믿음의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의도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율법을 지키고 실천한다 해도 사람이 죄를 짓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인간 자체가 더럽고 불의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우리를 의로운 사람이 되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선과 악을 윤리와 도덕을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윤리와 도덕에서 어긋나지 않는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윤리적으로 사는 것을 죄를 짓지 않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자기 기준으로 선악을 구별하는 것은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선악 체계로 사는 것이고 그것을 죄를 짓는 것으로 말합니다. 따라서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은 선악 체계의 세상이 아니라 십자가의 용서와 자비의 세상인 예수 안에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인 것입니다.
21절에서 바울은“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율법 아래에 있습니까? 아니면 율법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있습니까? 기독교인이라면 율법이 아닌 십자가 아래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문제는 십자가 아래 있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는 율법 아래에 있는데도 십자가 아래 있다고 착각합니다. 지금의 교회는 이런 문제로 가득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의미를 모르고 자기 생각에 맞는 말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귀에 속해서 마귀의 다스림을 받고 있는데도 그러한 실상에 대해 알지 못하고 부인하는 것입니다.
약 2:9절에 보면“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죄를 범하는 범법자로 정죄하는 것은 율법입니다. 따라서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것은 범법자로 정죄 받는 세계에 있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합니다. 율법을 지켜서 참된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되는 것에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온 율법을 지켰다 해도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된다는 말은 무시해 버립니다(약 2:10).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것을 마치 구약시대로 돌아가 제사를 지내고 몸에 할례를 행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실 지금의 교회가 안식일이 주일로 변경되었다고 하면서 주일성수를 가르치는 것이나, 구약의 십일조는 폐기되지 않고 신약 시대로까지 계속 이어진 것으로 가르치는 모든 것이 율법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다만 교회를 유지하는 데 필요하고 유익한 것들이기에 믿음의 행위라는 구실을 붙여 놓지 않는 것일 뿐입니다. 이것이 정죄가 없는 예수님의 세계가 아니라 마귀에게 속한 정죄의 세계에서 용서와 자비의 기쁨이 아니라 자기 행함을 만족과 즐거움으로 삼는 죄의 세계입니다.
요 8장에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예수께 끌고 와서‘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를 돌로 치라고 명하였는데 당신은 어떻게 말하겠는가?’라고 묻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 아래에 있습니다. 율법의 세계에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모세의 율법을 언급하며 여인의 처리 문제를 묻는 것은 예수님의 신앙 세계가 율법을 따르는 자신들과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어 고발하기 위한 노림수였습니다.
그렇다면‘용서하라’는 말로 예수님의 세계가 용서의 세계임을 알려주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손가락으로 땅에 글을 쓰시고“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다시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자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 모두 그 자리를 떠나게 됩니다.
요 8:10절을 보면“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라고 말씀합니다.
여인을 정죄한 모든 자가 떠난 자리에는 예수님과 여인만 있습니다. 여인에게‘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라고 물으신 것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세계는 정죄가 없는 세계임을 말씀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십자가의 세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용서의 법이 되어 죄와 사망에서 해방한 자유의 세계입니다. 때문에 자유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말하는 십자가의 용서는 단지 용서를 통해서 죄로 인한 부담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요 8:11-12절을 보면“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라는 말씀을 합니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이것을 음행의 죄를 다시 범하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우리의 의식 구조가 여전히 윤리와 도덕을 기준으로 선악을 판단하는 선악 체계로 굳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내용을 소홀히 생각하면 복음을 알고 십자가를 안다고 하면서도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신의 실상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좋아하고 의지하는 것이 율법이라는 사실을 놓치게 됩니다.‘나는 율법을 따르지 않는다’며 자기를 방어하겠지만 아담 안에서 태어난 인간의 속성은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것이 음행을 의미하는 것이면 예수님도 음행을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시각에서 바라보신다는 뜻이 됩니다. 음행이 짓지 않아야 할 죄이지만 서기관과 바리새인처럼 율법으로 다스리지 않고 용서한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은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여자에게도 해당합니다. 사람은 음행이든 무엇이든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설령 여인이 예수님을 만난 후에 음행하지 않는다고 해도 죄 없는 자가 되지는 않습니다. 음행이 아닌 다른 죄를 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음행을 염두에 두시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여인을 돌로 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음행한 여인을 율법이 아닌 긍휼과 자비로 대합니다. 이것이‘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라는 말씀입니다. 여인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율법 아래에서 정죄 받고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인생에서 정죄 대신 긍휼과 자비로 대접받는 세계에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율법의 정죄가 아니라 긍휼과 자비로 대접받은 여인이 죄를 범한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음행과 같은 죄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긍휼과 자비를 받은 자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처럼 율법 아래에서 자신을 정죄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자기를 정죄하는 것은 옳다고 생각하는 자기 기준으로 자신과 타인을 판단하는 것인데 그것이 정죄하지 않는다는 예수님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롬 14:22-23절을 보면“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저마다 옳다고 생각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자기의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며 자기를 책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 안에서 옳고 그름의 기준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기준이 되면 우리는 누구도 자신을 옳다고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정죄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정죄하지 않고 죄 없다고 하신 용서의 은총과 자비하심만 남게 됩니다. 그런데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는 것은 용서와 자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인정하는 것을 따르는 것이며 바울은 그것을 믿음을 따라 하지 않는 죄로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율법 아래에 있는 것은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기준을 따로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자신이 옳다 하는 바를 따라 사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자의 삶으로 내세우는 그것이 율법 아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을 따라 하지 않는 죄로 규정되는 예수님의 세계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세계를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요? 오직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자만 알 수 있는 특이한 세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마 12:31-32절에서 예수님은“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말씀에서 사람들이 염려하는 것은 자신의 구원 문제입니다. 행여 성령을 모독하고 거역하는 죄를 범하면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지옥에 가게 된다는 것에 불안감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모독하고 거역하는 죄가 무엇인가에 관심을 둡니다. 성령을 모독하고 거역하는 죄가 무엇인가를 알고 그 죄를 피하여 사하심을 얻지 못하여 구원받지 못하는 불상사가 없게 하겠다는 의도이지만 그것이 이미 성령을 모독하는 죄라는 것은 알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으로 행하는 은사를 부정하는 것을 성령을 모독하고 거역하는 것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성령을 힘입어 귀신 쫓아내신 것을 오히려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한 것으로 배척한 바리새인을 두고 한 말입니다. 그래서 방언과 귀신을 쫓아내고 치료하는 은사를 부정하는 그것이 성령을 거역하는 사하심을 얻지 못할 죄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또한 자신에게 옳은 것을 기준으로 자기 옳음을 증거 하는 것에 초점을 둔 해석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은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우리 자신의 의지와 선택에 따른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으로 예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되면 도무지 예수님을 믿을 수 없고 예수님의 세계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의 악함에 대해서도 알게 됩니다. 인간은 누구든 사탄의 권세에 붙들려 다스림 받고 있다는 것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되는 것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이루신 용서의 능력이 일방적으로 자신에게 베풀어진 결과로 믿게 됩니다. 신자가 이러한 믿음으로 산다면 인간에게 선을 행할 가능성을 두는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되는 것만을 예수님의 세계로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일하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모독하고 거역하는 것은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성령은 선을 행할 수 있다는 우리의 모든 가능성을 무너뜨리는데 여전히 자신의 가능성으로 믿음을 보이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령을 거역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예수 안에서 당연합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피로 인한 용서의 능력이 작용하는 세계입니다. 정죄하는 것이 없고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과 자비하심이 넘치는 세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안에 부르시고 거룩한 성도 되게 하신 것도 우리의 어떤 행위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일만 하나님께 기쁨이 됩니다. 이것이 참된 진리임을 증거 하기 위해 도구로 부르신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인 거룩한 성도입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 십자가가 아닌 율법입니다. 분명히 옳은 행위를 하고 있는데도 죄로 인해 죽은 자로 간주하는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고 싫어합니다. 하지만 율법에는 옳은 일을 한 것만큼 칭찬이 있습니다. 행함이 없으면 믿음 없는 것으로 구별하기에 행함이 있는 자신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육체를 위해 사는 사람은 율법을 찾으며 율법 아래 있고자 합니다. 용서의 세계에서 죄 사함 받은 기쁨보다 자기에게 만족이 되는 즐거움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헛되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성령이 우리를 저주의 자리로 끌어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