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1:1-3http://onlycross.net/videos/gal/gal-010103.mp4
<본문>
1.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2.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3.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설교>
인간이 결코 떠나지 못하고 떠날 수 없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나라는 자리에서 떠나지 못하기 때문에 무엇을 하더라도‘나를 위하여’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이든 나에게 좋은 것, 나를 현재보다 더 행복하고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어 주는 모든 것은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과 협상을 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종교 생활입니다.‘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면 이것이 나의 것이 되게 할 수 있을까?’라는 자기 뜻을 세우고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말이 여러분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을 알고 복음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과 협상하여 좋은 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는 의도는 전혀 없이 하나님을 찾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하나님 열심히 기도하고 헌금하겠습니다. 부자 되게 해주십시오’라는 노골적인 기도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과 협상하지 않는 참된 신앙인 것은 아닙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은 자기 자신을 떠나지 못합니다. 무엇을 하든 바탕은 자기 사랑으로 굳게 깔려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도 하나님이 중심인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를 중심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성경이‘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본래 의도에서 벗어나 인간을 위한 종교 경전의 수준으로 해석되는 이유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도 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2,3절)라고 말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것 중의 하나가 은혜와 평강입니다. 은혜와 평강이라는 말에서 삶의 행복을 상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는 은혜와 평강이라면 삶이 현재보다 더 행복하게 될 거라는 기대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은혜와 평강이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알고 싶어 하는 것이고, 은혜와 평강의 상태가 아닌 것 같은 자신의 현재에 불만과 아쉬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바울이 우리가 생각하고 기대하는 그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한다는 말을 갈라디아 교회에 하는 것일까요? 그러면 바울은 정말 아무 의미 없이 단지 편지의 형식과 예의의 차원에서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다른 의미를 생각할 것 없이 읽고 지나가면 됩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이 전한 복음과 바울의 사도 됨을 부정하는 자들이 전한 다른 복음이 서로 충돌하는 혼란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은혜와 평강의 상태가 되려면 바울의 복음과 다른 복음이 서로 타협을 하여 화해를 하든, 아니면 둘 중 하나를 따라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다툼과 혼란에서 벗어나 평화의 상태가 되는 은혜와 평강입니다. 하지만 은혜와 평강을 그런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은 자기 사랑이 중심이 된 자기를 위한 해석일 뿐입니다.
은혜와 평강을 나의 것으로 소유하고자 하는 것이 탐심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은혜와 평강을 누릴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 하는 것 또한 하나님과 협상하고자 하는 종교심입니다. 결국 우리는 이러한 종교심을 가진 자로 복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출처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기에‘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먼저 생각할 것은 신자에게는‘어떻게 하면’이라는 말 자체가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단순히‘복음은 인간의 행함을 인정하지 않는다’라는 차원이 아니라 신자라는 존재에 의미를 두고 생각해 보십시오. 복음이 인간의 행함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맞지만 왜 인정하지 않는지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롬 1:5-7절을 보면“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에서 중점을 두어야 하는 것은 성도라는 신분은 사랑이 능력이 되어 하나님과 연결됨으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성도라는 신분에 영향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행함이 윤리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선하든 악하든 그것 때문에 변동이 생기는 신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연결된 관계는 무엇으로도 흔들리거나 손상되는 경우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로 연결된 은혜와 평강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은혜와 평강을 쉽게 실감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나를 위한 은혜와 평강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은혜와 평강이 있으면 주변의 나를 힘들게 하는 모든 환경적 요소들이 변하여 기쁨과 행복을 주는 것으로 상상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평강을 심적인 안정과 평안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삶에 짓눌린 감정으로는 실감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1절에서 바울은“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라고 시작합니다.
바울은 사도 됨의 시작을 사람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에게 두고 있습니다. 바울 자신으로 시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자기 자신으로 시작했습니다.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며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고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며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는 자신의 자랑과 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 그 모든 것은 배설물로 여겨지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로 시작할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된 것입니다. 자신으로 시작을 해봐야 예수에 대한 비방자, 박해자, 폭행자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이것이 예수를 만난 자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게 된다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으로 다가오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예수님의 용서의 은혜가 인간의 모든 악함을 덮어 버리고 다만 하나님의 사랑이 이유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부활 생명과 연결된 관계에 있게 된 구원의 내막은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운 비밀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 구원을 아는 것이 곧 은혜와 평강에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신자로 존재하게 된 내막 자체가 은혜와 평강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창 19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유황과 불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실 때 그곳에서 도망치는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본 것 때문에 소금 기둥이 됩니다. 이것을 두고 신자는 세상을 돌아보면 안 된다는 교훈의 말을 하기도 하지만 과연 세상을 돌아보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을까요?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듣는 순간에도 잊히지 않는 것이 세상에 대한 생각과 미련이며 목사의 설교에도 세상을 향한 탐심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항상 뒤를 돌아보는 것이 인간 됨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보는 것은 하나님이 유황과 불로 멸하는 소돔과 고모라가 좋았기 때문입니다. 좋은 것이 무너지고 사라지는 것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으로 뒤를 돌아본 것이고, 한편으로는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고 그곳에서 나오게 하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싫어한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롯의 아내만 소돔과 고모라를 좋아한 것이 아닙니다. 창 19:15-16절의“동틀 때에 천사가 롯을 재촉하여 이르되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어 내라 이 성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할까 하노라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는 내용을 보면 롯 또한 천사가 재촉하고 손을 잡아끌어 나오게 할 정도로 하나님이 심판하실 곳에 미련을 두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천사가 롯과 그 아내와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둔 것을 두고‘여호와께서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여호와의 자비는 천사에게 붙들려 소돔과 고모라 밖에 나와서 멸망한 소돔과 고모라를 바라봄으로 실감하게 됩니다. 롯의 아내처럼 뒤를 돌아보면 지금 자신에게 여호와의 자비가 더하여 있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하고 좋아하는 소돔과 고모라가 무너지는 것으로 아쉬워하는 것만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인간으로는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은 모든 것을 깨닫고 실감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 사랑, 긍휼, 자비,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삶에서 실감하고 느끼고 누리면서 행복해 보고자 하는 것은 지금도 뒤를 돌아보고 있고, 좋아하는 것이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세상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탐심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이 축복과 저주로 규정하신 것을 그대로 동의하고 받아들일 때 있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규정하신 축복과 저조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이 축복으로 규정하신 것을 저주로, 저주로 규정하신 것을 축복으로 여깁니다. 이것을 보여준 것이 롯의 아내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생각은 그렇게 다르다는 것을 말씀으로 실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한다는 바울의 말을 보면서 우리는 누구를 생각할까요? 하나님 아버지일까요?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일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나 자신입니다. 우리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게 하시는 하나님도 예수님도 아니라 은혜와 평강이 나의 것이 되어 누리는 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 가운데 있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이 증거를 무시하지 않고 증거로 활용하면서 자신의 죄인 됨을 선명하게 인식하는 자가 신자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그 어떤 의로운 것도 사람에게서 나고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없음을 알기에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의 세계에서는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과거의 행적이나 인간 됨을 근거로 해서 그를 부정할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으로 시작한다면 바울과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갈라디아 여러 교회는 사랑이 능력이 되어 하나님과 연결된 관계로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옵니다. 흔히 말하는 것처럼 ‘은혜받았습니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은혜가 은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은혜도 평강도 믿음도 자기를 기준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본인에게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으면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예수로 말미암은 어떤 것도 우리의 것이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가령 기독교인들이‘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말할 때 그 의미는 자기의 믿음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의 출처가 각자 개인이 되고 개인의 것으로 이해됨으로써‘누구의 믿음이 더 좋은가?’라는 경쟁과 비교의 틀에 갇히게 됩니다. 이런 믿음으로는‘나는 예수님의 것으로 예수님을 위해 존재합니다’라는 시각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라는 바울의 말은 사도의 직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예수로 말미암은 예수의 것으로 시작해야 함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믿음도 사람에게서 날 수 없는 예수님의 것임을 알게 하는 것이 참된 믿음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잘 믿고 싶고 잘 믿어 보려는 인간의 모든 시도와 노력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은혜와 평강도 우리의 것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한다는 바울의 말은 교회의 문제가 해결되어 평화로운 관계가 될 것을 촉구하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이 은혜와 평강의 의미라면 애당초 모든 교회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나님이 조치하셨어야 합니다. 다른 복음은 교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으시고 바울이 전한 복음만 인정하면서 같은 마음이 되게 하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원하는 것은 아마 이런 방식의 일하심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우리가 꿈꾸는 나에게 만족이 되고 나를 위한 종교 세계가 굳건히 버티고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종교 세계에 갇힌 자에게서 인간의 행함을 근거로 한 판단이 나오는 것입니다.‘예수를 핍박한 바울은 사도가 아니다’는 것 역시 종교의 시각으로 바울을 바라보는 죄의 산물입니다.
바울의 복음은 우리를‘내가 어떻게 하면’의 세계에서 벗어나게 합니다.‘내가 어떻게 하면’이라는 세계에서는 자신이 잘하고 못하는 것을 기준으로 자기를 바라보는 것만 있을 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시고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구원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잘함으로 자신의 믿음을 증거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한 성도로 부르시고 시작합니다. 창세 전에 택하시고 사랑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작정하시고 시작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인간인지 비교하여 살피지 않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으로 구원하시고 시작하셨습니다. 모든 인간은 저주의 존재이기에 비교를 한다 해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거룩한 성도로 부르시고 구원하시고 도무지 구원될 수 없는 저주의 존재임을 보게 하시면서 하나님과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 은혜와 평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