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02 19:23

(63강) 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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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후 11:5-12

고후 11:5-12http://onlycross.net/videos/co2/co2-110512.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5.나는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로 생각하노라

6.내가 비록 말에는 부족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

7.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죄를 지었느냐

8.내가 너희를 섬기기 위하여 다른 여러 교회에서 비용을 받은 것은 탈취한 것이라

9.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비용이 부족하였으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였음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고 또 조심하리라

10.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속에 있으니 아가야 지방에서 나의 이 자랑이 막히지 아니하리라

11.어떠한 까닭이냐 내가 너희를 사랑하지 아니함이냐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12.나는 내가 해 온 그대로 앞으로도 하리니 기회를 찾는 자들이 그 자랑하는 일로 우리와 같이 인정 받으려는 그 기회를 끊으려 함이라

 

 

<설교>

예수님의 제자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한 후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스스로 목매어 죽음으로 열두 명의 제자는 열 한 명이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늘로 가신 이후에 예루살렘에 예수님을 따르는 자 약 백이십 명이 모인 자리에서 베드로가 일어나 가룟 유다 대신 한 사람을 세워 열한 제자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한다는 말을 합니다. 유다의 빈자리를 채워 사도의 수를 열두 명이 되게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보궐선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세운 사도의 자격은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1:21-22)에서 잘 나타납니다.

 

 

예수님과 함께 다니며 생활하던 제자들과 함께 다니던 사람 중의 하나를 사도로 세우기로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하늘로 가시기까지 모든 일을 보고 경험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기준에 따라 요셉과 맛디아가 후보자가 되고 제비뽑기라는 방식으로 맛디아가 선출되어 열한 사도와 함께 사도의 수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처럼 열한 제자가 한 명의 사도를 보충하는 기준에 따른다면 바울은 사도로 인정받을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한 바가 없고 예수님의 죽으심, 부활, 하늘로 가심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자리에 바울이 있었다면 자격 미달로 인해 사도로 선출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바울은 이런 이유로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사도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더군다나 믿는 자를 핍박했던 행적을 생각하면 누구라도 바울을 사도로 인정하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마치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교도소에서 출소한 후에 신학 공부를 해서 목사가 되었다고 하면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조건들을 따져보면 바울이 열두 제자보다 사도로서 부족하게 보일 수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열두 제자가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생활했다는 것은 사도다운 사도로 인정받기에 충분한 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그렇게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5절을 보면나는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로 생각하노라고 말합니다.

 

 

지극히 크다는 사도는 열두 제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짐작됩니다. 예수를 핍박했던 바울보다 예수님과 함께 생활했던 열두 제자가 큰 사도로 인정받고 있던 것을 두고 한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열두 사도에 비해 바울 자신이 부족한 것은 조금도 없다는 것입니다.

 

 

고전 15:9절에 보면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는 말을 합니다.

 

 

바울이 자신을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로 지칭하는 것은 다른 사도와 비교한 자기 가치에 대한 평가가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지 않았고,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하늘로 가신 것도 친히 목격하지 못했고, 오히려 예수를 핍박했던 것을 사도로서의 약점으로 인정하면서 스스로를 사도 중의 가장 작은 자로 인정하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고전 15:7-8절을 보면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 말합니다.

 

 

이상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바울에게 나타나신 적이 없는데 바울은 자신에게도 보이셨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처음 만난 것은 다메섹입니다. 그때는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하늘로 가신 후입니다. 또한 하늘로 가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만나셨던 것처럼 바울 앞에 실제로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빛이 비치는 가운데 소리로 나타나신 것이 전부입니다. 이것을 두고내게도 보이셨다고 말한 것이면 바울의 말은 부풀려진 것이라 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바울은 어떤 의미에서내게도 보이셨다고 말한 것일까요? 예수님을 만난 열두 제자에게 지기 싫어서 소리를 들은 자기 경험을 과장한 것일까요? 이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의미,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이해하면 됩니다.

 

 

5:3-4절에 보면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제자로 부르실 때의 이야기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내렸고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을 본 베드로가 예수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5:8)라고 고백한 것은 베드로에게는 예수님의 제자로 출발할 때의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 21:3-6절에 보면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고 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은 예수이신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부활한 후의 예수님 모습이 달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를 예수로 알아본 것은 베드로가 제자로 부름을 받을 때의 사건 때문입니다. 베드로로 하여금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게 했던 그 사건을 다시 경험하게 하심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 말씀대로 그물을 던져 고기를 많이 잡은 사건이 없었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보면서도 예수인 줄 알아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설령 예수로 알아봤다 해도 알아본 것으로 끝났다면 그 또한 의미는 없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부활한 예수를 만난 경험이 없다는 것은 사도로서 부족한 조건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은 지극히 큰 사도로 인정되는 그들에 비해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만나고 손을 잡고 악수를 하고 대화를 한 경험이 있다 해도 그것이 사도로 하여금 하나님이 부르신 뜻을 따라 사도의 역할을 다하게 하는 능력이나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 할 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를 증거하는 일이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습니다. 만나는 사람에게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부활의 주를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마치 어떤 제품을 소개하듯 말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을 증거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12절에서 나는 내가 해 온 그대로 앞으로도 하리니 기회를 찾는 자들이 그 자랑하는 일로 우리와 같이 인정받으려는 그 기회를 끊으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사도로 부름을 받은 후부터 계속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전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생각하면 해 온 그대로 앞으로도 하겠다는 것은 지금까지 복음을 전해온 것처럼 앞으로도 복음만 전하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 말을 하는 이유는 사도의 흉내를 내는 것으로 자기를 자랑하고 인정받으려고 하는 기회를 끊으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바울의해 온 그대로 앞으로도 하리니라는 말은 어떤 일도 자기 자랑이 될 수 없게 하는 십자가의 길로만 가겠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고전 4:9절을 보면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이해한 사도로서의 자기 자리였고 말씀이 바울에게 일하며 바울을 이끌어 왔던 길이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한 내가 해 온 그대로라는 말에 해당이 된다면앞으로도 하리니라는 말은 지금까지 바울이 자기 인생을 계획하고 자기 자랑과 이름을 위해 복음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는 현장에서 그리스도만 나타나고 증거되는 길로 가기를 원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8-10절을 보면 내가 너희를 섬기기 위하여 다른 여러 교회에서 비용을 받은 것은 탈취한 것이라 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비용이 부족하였으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였음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고 또 조심하리라 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속에 있으니 아가야 지방에서 나의 이 자랑이 막히지 아니하리라는 말을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교회로부터 생활비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바울 자신이 사도로 부족하다는 것을 알기에 차마 생활비를 받지 못한 것으로 비난하는 빌미로 삼은 자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에 대해 바울은 다른 교회가 생활비를 담당해 주었고, 또 생활비가 부족하였지만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기 때문에 교회에 누를 끼치지 않았다는 말로 자신을 변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단지 자신에 대한 오해를 풀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사도를 사도로 알아보고 판단하는 방법이 생활비를 받고 받지 않는 여부라는 것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생활비를 받지 않은 것은 고린도 교회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다른 교회로부터 부족한 것을 보충받았기에 고린도 교회에 누를 끼칠 필요도 없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바울은 생활비의 문제에 전혀 마음을 두지 않았다는 뜻이 됩니다. 생활비를 받는 것으로 사도임을 보이려는 의도도 없었고, 생활비를 받지 않는 것으로 돈에 대해 깨끗한 사도의 면을 보이는 것에도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세상으로부터 인기를 얻고 모든 사람의 중심에 자리할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을 분노하게 하는 말은 삼가고, 치유의 능력을 발휘하여 사람들의 병을 고쳐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세상으로부터 영웅 대접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사탄의 시험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외면하고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길로 가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자유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바울도 자유자입니다. 바울 스스로 자유한 삶을 살게 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예수님의 자유를 깨닫고 그 자유에 붙들린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바울을 사도로 부족하다고 비난하는 것은 자기에게 매이고 세상과 사람에 대해 자유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말한다 해도 그것은 다른 예수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고후 6:3-5절을 보면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사도의 직분, 하나님의 일꾼을 환난, 궁핍, 고난, 매 맞음, 갇힘, 난동 등의 용어를 동원하여 말합니다. 흔히 직분에 대해 이해하는 것처럼 영광, , 나의 이름 등은 없습니다. 신자라는 신분으로,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나에게 어떤 이득과 자랑을 안겨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없이 낮아짐을 경험하게 되는 길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바로 부르신 그 자리가 인간의 무능과 불의함을 깨닫게 되면서 낮아짐을 경험하게 하는 은혜의 현장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3:13-14절을 보면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는 말을 합니다.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라는 것은 과거의 좋지 않은 일이나 괴로운 것은 다 잊어버리고 미래에 주어질 하늘의 상을 생각하며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이 과거의 일을 기억에서 아예 지워버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바울이 잊어버리라고 말하는 것은 과거의 일로 인해서 현재의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는 중대한 오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어제의 사건과 상관없이 오늘 새롭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날마다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로 말미암아 새로운 사람으로 하나님의 부르신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주를 증거 하는 신자 됨입니다.

 

 

바울이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한 지나간 일이 바울의 오늘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바울에게 오늘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피의 능력으로 거룩한 성도라는 새로움을 입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새로운 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해 온 그대로 앞으로도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만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앞으로 어떤 일을 하시든 모든 것이 은혜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을 사는 신자의 비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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