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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믿지 않는 것이다.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도 ‘너는 나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라고 되어 있다. ‘믿음은 하나님만 믿는 것이다’ 이 말에 반박할 기독교인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는 말이나 ‘하나님만 믿는다’는 말을 오해를 한다. 즉 불교의 부처에게 절을 안하고, 무당에게 찾아가서 굿을 안하고, 토정비결을 안보는 것을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것은 엄청난 착각이다.


사람이 절간을 찾고 부처를 찾아서 기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세상의 복이고, 화가 물러가는 것이고, 가정의 평화이다. 그렇다면 교회를 찾고 하나님을 부르면서 기도하고 예배하는 그 내면에는 무엇이 담겨 있는가? 과연 불교인과 다른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무당을 찾아서 굿을 하는 목적도 다르지 않다. 화를 물리치고 복을 얻자는 목적이 아닌가?


지금 교회의 모습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토정비결을 보는 목적도 한해를 별탈없이 잘 지내보자는 마음 아닌가? 교회에서 신년기도회를 할 때 한해의 평안을 기원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그러면서도 자기 입에서 하나님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고,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을 믿고 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제사를 드릴 때, 제사를 드림으로써 그것이 자신들의 의가 되는 줄로 알았다. 하나님은 자기들의 제사를 받으시고 복을 내려주실 것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성의를 보이기에 힘을 썼다. 오늘날 교회가 예배를 성의 있게, 거룩하고 장엄하게 잘 드리면 그것이 복의 통로가 되는 줄로 여기는 것과 뭐가 다른가?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6-9)라고 하신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께 뭔가를 드리면 그것이 자기들을 복되게 하는 줄로 알았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뭔가 다른 혜택을 바라고 하나님을 믿는 척 할 뿐이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의 속임수에 결코 속지 않으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너는 나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는 말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힘으로 삼지 말라는 말씀이다. 이스라엘에게 힘이 될 대상은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야 한다. 왜냐하면 애굽의 모든 신을 정복하고 이스라엘을 구출하신 여호와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이것을 바라보며 오직 여호와만을 자기들의 힘으로 삼아야 했다.


여호와만 힘으로 삼는다는 것은, 이 땅의 것은 나에게 있든 없든 그것으로 영향을 받지 않는 삶을 말한다. 그러나 세상의 것이 힘으로 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세상의 것이 없을 때 낙심이 되고 원망과 불평이 나오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힘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의 힘을 이용하고자 할뿐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다른 신을 언급하시는 것은 하나님 외에 또 신적 존재가 있다는 말인가? 그럴 수는 없다. 신은 오직 한분 하나님이시다. 그러면 다른 신이란 의미가 무엇인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신에 대한 개념은 자기를 도와주는 수호신이다. 즉 신이란 자신을 돕고, 어려운 일을 해결해 주며,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결국 사람이 돈이 있어야 자신이 행복하게 되고, 돈이 자기를 돕고, 돈이 자기를 잘되게 한다고 생각하면 결국 그 사람에게는 돈이 신으로 군림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다른 신이란 실제 하나님과 같은 신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힘으로 삼는 세상의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는 말씀을 통해서 재물을 섬김 받는 대상으로 말씀하셨던 것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신자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 외에 이 땅의 것은 그 어떤 것도 내 힘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 것을 말한다. 십계명의 제2계명도 부처와 같은 형상을 만들고 거기에 절하지 말라는 의도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신적 역할을 대신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즉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을 의지하거나 힘으로 삼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이 과연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 내 힘으로 삼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있는 믿음인지를 살펴보자.


분명히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만 의지한다는 것은 세상의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나에게는 힘의 대상이 아니고 행복의 조건도 아니다는 것을 전제한다. 즉 세상의 것이 있든 없든 그것은 별 의미 없다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최고의 복으로 삼고 그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을 믿음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세상의 것을 소유하는 것을 복으로 여기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다면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믿고 있는 것이 된다.


이 땅의 것은 그 무엇도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다라고 말할 때 거기에는 교회도 포함된다. 흔히 신자들은 하나님하면 무조건 교회를 연상한다. 하나님은 교회를 지키고, 교회를 보호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에 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하는 것이고, 교회의 일은 무조건 하나님의 일이라고 결론지어 버린다. 따라서 교회를 방해하는 것은 하나님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 중심이었다. 하나님은 성전에 함께 하시고 성전에서 드리는 자기들의 제사를 당연히 받으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모든 열심과 정성은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눈에 보이는 성전에 거룩의 의미를 두고 성전에서 행하는 모든 것도 자동적으로 거룩한 일이 된다고 여겼던 것이다. 때문에 예수님이 자신을 성전이라고 하신 말씀을 성전을 모독하는 것으로 여기고 분노했던 것이다.


예수님이 자신을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성전에서 드려지는 제사가 그리스도안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것이 곧 성전에 거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안에서 자신을 죄를 알고 주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는 자만이 성전에 거하며 하나님과 함께 한다.


예수님이 자신을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이제 이 땅에는 거룩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안에서만 거룩이다. 때문에 오늘날 교회를, 즉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하면서 거룩시하고 예배당을 건축하고 장식하는데 모든 열의를 기울이면서 헌금을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것임을 알아야한다.


예배당은 단지 예배드리기 위해서 모이는 장소에 불과하다. 예배당에 구약의 성전의 의미는 전혀 담겨 있지 않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이기 때문에 거룩하다는 것도 맞지 않는 말이다. 하나님은 제사가 드려지는 구약의 성전도 부정하셨기 때문이다. 예배당이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 아니다. 하나님은 성전에 함께 하시고, 그 성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오직 그리스도안에서 만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을 강조했다.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말은 주님의 것이 곧 내것이라는 의미다. 주님의 삶도, 주님의 운명도, 다 내가 좇아가야 할 목표라는 것이다. 자기의 소망과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주님을 찾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주님을 찾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이것은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알고 십자가를 아는 자들에게서만 보여진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새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새사람이 된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달라진 사람들, 거듭난 사람들이 십자가를 바라보며 모이는 것을 교회라고 하는 것이다. 때문에 교회는 눈에 보이는 예배당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런데 흔히 교회를 말할 때 사람들은 예배당 건물과, 목사를 연상한다. 즉 예배당과 목사만 있으면 교회가 되는 줄로 아는 것이다. 예배당이 없으면 교회가 될 수 없고, 목사가 없으면 교회가 될 수 없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교회는 예배당이 있다고 해서 교회가 아니고, 모이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교회가 아니며, 목사가 있다고 해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은 누구라도 흉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교회가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할 것같으면 아무나 흉내낼 수 없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마쳐져야 한다. 그래야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몸으로 존재할 수 있다. 만약 사람이 개입해서 사람의 힘으로 교회가 되어져 간다면 그것은 사람의 단체이지 절대로 교회는 아니다. 앞서 말한 대로 교회는 그리스도를 아는 자들의 모임, 즉 다른 말로 십자가를 알고 십자가를 좇는 자들, 거듭난자들의 모임이다. 이 모임은 지상에 세워진 건물에 모여서 예배드리는 모임과는 전혀 다르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십자가를 아는 자들의 모임의 의미로 생각하지 않는다. 예수님을 알고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신 일을 알고 그 일이 지금 자신을 통해서 세상에 보여지기를 소망하며 사는 것을 말한다.


이들은 자기의 단체가 커지는데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자신의 단체가 커지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시면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추종자를 많이 끌어 모으라고 지시하신 적이 없다. 교회를 키우라고 지시하신 적도 없다.


그런데 지금 소위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속해 있는 단체, 즉 자신들이 교회라고 주장하는 그 단체를 키우기에 모든 열심을 다 쏟는다. 그것을 자기들의 사명이라고 얘기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시지도 않은 것을 사명이라고 고집 한다. 예수님이 관심 두지 않는 것에 관심을 두고 살면서도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고, 주님을 사랑한다고 떠든다.


신자는 철저하게 성경으로 시작해서, 성경으로 마쳐야 한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지시하신 대로 움직일 뿐이다. 내 생각과 사고방식에 맞지 않아도 말씀대로 할뿐이다. 말씀대로 하다가 돌에 맞아 죽어도 성경은 포기할 수 없다. 신자가 성경으로 시작해서 성경으로 마치기 위해서는 자기의 생각을 버려야 한다. 인간적인 사고방식을 버리는 것만이 성경에 뛰어들 수 있는 길이 된다.


그렇다면 성경과 대치되는 인간적인 사고방식의 예를 들어보자. 인간적인 사고방식은 예배당을 키우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편에서는 당연하다. 종교적으로 당연한 일이기에 예배당을 건축하고, 키우는 일을 하나님의 일로 규정한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모이는 예배당을 좋게 하고, 웅장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 하지만 성경 어디에 예배당을 짓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가?


역대상 17장 1절에 보면 다윗이 자기는 백향목 집에 거하는데 하나님의 법궤가 휘장 아래 거하는 것이 송구스러워서 법궤가 거할 백향목 집을 짓겠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때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다윗에게 내가 언제 백향목 집을 지으라고 했더냐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대상 17:6).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성전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음을 명백하게 말해준다.


그런데 많은 목회자들은 다윗이 한 말을 들어서 우리는 좋은 집에 살면서 하나님의 집(예배당)을 이렇게 초라하게 두어서 되겠는가라고 다그친다. 이 말에 교인들은 꼼짝 못하고 돈을 거둬서 예배당을 짓는다. 하나님이 지시한 적도 없는 것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우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복을 받는 비결이라고 성경에 없는 것을 들어서 거짓을 말한다. 거짓을 복음이라고 말하는 자는 거짓선지자이다.  


사람들이 왜 예배당 건물에 집착을 하는가? 일단 눈에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서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수십 억을 들여서 지어놓은 웅장한 예배당을 들어서면서 교인들은 자기 교회에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으로 착각을 하게 될 것이다. 웅장한 예배당을 보면서 자기들의 공로를 지우지 못할 것이다. 이런 웅장한 예배당에서 예배드리니까 이 예배는 하나님이 분명히 받으실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런 사람들은 예배당이 없이 천막을 치고 예배드리는 것을 무시할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천막에 함께 하시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교회(예배당)를 믿는 모습이다.


그럼 목사들은 무엇 때문에 교회를 키우고 교회 건물을 건축하는데 온 관심을 집중시키는가? 목사의 능력과 힘은 교회의 크기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노회든 총회든 목사의 모임에서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목사는 교인수가 많고, 재정이 많고, 커다란 건물을 가지고 있는 목사다.


이러한 목사는 노회서도 무시하지 못하고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목에 힘을 주고, 자기의 능력을 과시하면서 조그만 교회의 목사를 바라보는 그 쾌감 때문에 목사들은 교회를 키우고자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한다. 이런 목사 아닌 목사들에게 하나님이 과연 믿음의 대상이고, 하나님만 의지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들에게 하나님은 자기 교회를 키워주는 하나님에 불과하고, 정작 자기들의 힘은 큰 교회이다.


앞서 말한 대로 교회는 그리스도를 알고 십자가를 알게 된 사람들의 모임이다.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다. 즉 베드로와 같은 신앙고백을 하는, 베드로와 같이 그리스도를 내 주라고 고백하는 그 신앙 위에 교회가 세워진다는 것이다. 때문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모습만 보여주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모습이란 세상에 윤리와 도덕적인 모습을 드러내라는 것이 아니다. 윤리와 도덕적인 모습이 교회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이런 교회들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리스도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교회 사업이 목적이 되어버린다.


그리스도의 모습은 십자가에 죽으심이다. 이것을 방해는 것은 모두 사단이다. 베드로가 주님의 십자가를 만류했을 때 주님은 베드로에게 사단이라고 하셨다. 베드로는 교회와 교회 아닌 것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십자가를 만류하는 것은 죽음이 없는 예수를 등장시키는 것이다. 십자가 없는 예수, 고난이 없는 예수를 등장시키고자 하는 사단의 술책이다.


오늘날 이러한 교회가 너무 많다.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죽음이 없는 십자가를 말한다. 십자가는 단지 나에게 구원이라는 혜택을 베풀어준 도구로만 말할 뿐이다. 나를 천국에 보내주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만 말한다. 그러나 죽음이 없는 십자가란 있을 수 없다. 내가 십자가에 죽지 않고서는 구원은 나와 상관이 없어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고난을 말하는 교회, 그러나 그 고난은 교회 다니기 때문에 불신자로부터 받는 핍박이 아니라 주님을 좇기 위해서 세상의 것에 대한 소망을 버려야 하는 고난이다.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교회는 십자가 없는 예수, 죽음이 없는 십자가를 말한다. 눈에 보이는 땅의 것에 대한 포기가 없는 영생을 말하는 것이 거짓 교회이다. 이들은 눈에 보이는 예배당, 건물을 자기의 힘으로 삼는다. 그리고 그 힘을 더욱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다.


과연 무엇을 믿는가? 하나님을 믿는가 교회를 믿는가? 교회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내 힘의 도구도 아니다. 교회는 존재가 아니라 발생이다. 끊임없이 발생하는 것이 교회이다. 십자가를 아는 자들이 모일 때마다 교회는 발생한다. 이 교회는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고 하나님만 힘으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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