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는 말에는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다는 것은 성경은 인간의 사고방식과 욕심을 결코 옹호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인간의 생각은 항상 하나님의 생각과는 반대로 드러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행동하시는 반면에 인간은 자기를 중심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자기를 중심으로 행동하는 인간의 자아가 결국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기 때문에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죄를 고발하여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깨닫게 함으로 자기에 대해서 절망하게 하고 상대적으로 구원자 되시는 그리스도를 향해서 눈을 뜨게 하는 기적이 있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가에만 관심을 두어야 한다. 그러나 자기 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생각하면 결국 말씀은 나를 사랑하고, 나를 유익하게 하고, 나를 복주는 진리 아닌 말씀으로 전락되고 만다. 오늘날 현대교회가 진리 아닌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 교회 중심으로 흘러가는 이유도 말씀을 자기 중심으로 대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생명으로 이끌고자 하신다. 생명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말씀을 남겨 놓으셨다. 그런데 인간은 말씀을 통해서 생명을 얻고자 주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애초부터 인간의 생존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셨다.
생존의 욕구는 생명을 찾아가는 데 장애물이다. 인간이 생존의 문제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면 생명에 대한 관심을 희박해지게 되어 있다. 만약 생존의 욕구를 포기하지 못한채 생명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나는 단호하게 그 생명은 가짜 생명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은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고 말씀하셨다. 생명과 생존은 서로 공존하고 도와주는 관계가 아니라 대치되며 타협할 수 없는 관계이다. 왜냐하면 생존에 대한 관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법칙에 도전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다. 하나님의 계획은 생명이지 생존이 아니다. 때문에 지금 자신의 환경과 형편이 곧 나에 대한 하나님의 최상의 계획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 사랑안에서 생존의 욕구를 가지고 있을 때 나오는 것은 인생에 대한 자신의 계획이고 목표이다. 그럴 때 인간은 자연히 하나님이 주시는 환경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환경을 하나님께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종교적인 열심을 가미시키게 된다.
자신의 종교열심이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을거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도전이다. 그리고 이들이 말하는 생명은 자신의 생존의 문제에 대한 성취가 포함된 생명이기 때문에 가짜 생명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하신 것이나 오늘날 신자들을 세상에서 끄집어 내신 이유는 오직 하나,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생명에 장애가 되는 생존의 문제에 관심을 두고 계시겠는가? 결국 하나님은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 복을 주시고 우리를 지켜주신다고 생각하는 그 발상부터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는 모습임을 알아야 한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 우리는 성경 앞에서는 피조물에 불과함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말씀으로 지음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피조물은 말씀앞에서는 권리를 내세울 수 없다. 때문에 피조물이 가장 피조물 다운 것은 오로지 말씀이 명령하는대로 순종할 때이다.
인간은 피조물로서의 입장을 잘 알아야 한다. 피조물은 창조주와 거래할 수 없다. 창조주 또한 피조물과 어떤 거래도 요구하신 적이 없다. ‘하나님께 잘할 테니까 복주십시오’ 이것은 피조물로서 자기 위치를 잊어버린 교만한 태도이다. 피조물은 창조주가 주면 준대로 받아 살 뿐이다. 적게 줬다고 불평할 수도 없는 것이 바로 피조물인 인간이다.
살려주면 살려주시는 대로 감사하고 살아가는 것이 피조물다운 모습이고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인생의 계획과 목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자기 인생이 좋다 나쁘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 피조물이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손에 있는데 어떻게 우리가 감히 하나님께 내 뜻을 요구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을 안다면 성경을 자기중심적인 시각에서 보지 않게 될 것이다.
성경을 자신의 생존, 세상을 향한 자기의 포부와 꿈을 포기하지 않은채 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거래의 관계로 끌고가는 것이다. 즉 내가 말씀대로 지키고 열심히 하면 하나님은 나를 도와주실 것이다는 착각이다.
인간은 ‘주어진대로 살아라’는 말에는 참지를 못한다. ‘나도 힘이 있고 얼마든지 내 힘으로 할 수 있는데 주어진대로 살아라니 이것은 내 힘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박한다. ‘내 재능과 내 열심을 가지고 얼마든지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다.’ ‘지금 나에게 있는 지위와 재물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이 타락된 인간의 모습이다.
이런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보니까 결국은 ‘얼마든지 시키십시오. 다 해내겠습니다’는 쪽으로 나아간다. 그리고는 ‘하라는대로 할테니 대신 하나님은 이것을 주십시오’하고 자신의 요구사항을 제시하고 또는 열심히 안한 것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에게 내릴지 모르는 벌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이 피조물의 입장인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많은 규레들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규레를 지키는 사람만 구원하시겠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규레를 통해서 인간의 죄인됨과 무능력함을 알게 하시고 구원자 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신다. 결국 규례, 즉 율법은 복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지 행함의 조건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율법이 복음을 나타낸다는 것은 율법이 지향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율법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절기들도 결국 그리스도를 지향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따라서 율법 가운데 하나인 안식일의 문제도 그리스도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으로 율법의 역할은 끝났다는 의미다. 율법이 증거하기를 원했던 복음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이상 이제 율법은 그리스도안으로 그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했다. 그것은 지키는 것이 의가 되기 때문이 아니라 율법을 통해서 그들이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바로 알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즉 안식일에 노동을 하지 말라고 하셨으면 노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왜 노동을 하지 않아야 하는지 그 의미를 알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의로 여긴 것이다.
성경에서 최초의 안식은 천지창조와 더불어 시작한다. 즉 하나님의 안식은 세상이 태초에 하나님이 만드신 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결국 하나님이 만드신 처음 모습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안식을 깨드리는 행위이고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겠다는 것도 세상이 하나님이 만드신 처음 모습 그대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안식은 하나님의 기쁨의 날이다. 하나님의 기쁨은 세상이 처음의 모습을 유지함으로 지속된다. 그러나 인간은 처음의 모습에서 벗어나게 된다.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서 은혜로만 살아야할 인간이 자기에게 관심을 갖게 되고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벗어나게 된다. 이로 인해서 하나님의 안식은 깨어지게 된다.
이제 하나님은 처음의 모습을 잃어버린 기존의 것은 버리고 새로운 창조의 일을 하시고자 하신다.이 새로운 창조 안에 하나님은 새로운 인간의 탄생도 함께 포함하고 계신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의 구속사역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것을 목표로 하고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모든 규례 또한 구속사역을 지향하고 주어진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안식일은 하나님의 구속사역 안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안식일에 노동을 하지 말라고 하신다. 노동은 생존과 연관되어 있다. 사람은 생존을 위해서 일한다. 그런데 안식일에 노동을 쉬라는 것은 단지 휴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은 일단 인간의 생존에 대한 욕구를 끊어버리고 출발한다는 것이다. 만약 이것을 무시한다면 심판을 받게 된다. 법을 어겼기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지향하는 정신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안식일에 노동을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 은혜를 감사하기 위해서이다.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내 힘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고백을 위해서 노동을 쉬라는 것이다. 이 행위가 곧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안식이란 상대적으로 모든 세계는 오직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보존되고 있음을 고백하고 확인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런데 노동을 계속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보존된다는 것을 무시하고 결국 자기의 힘으로 자기를 보존시키고자 하는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안식일은 인간이 무엇때문에 심판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는 날이기도 하다.
그러나 노동을 쉬라는 것이 단지 내가 먹고 사는 문제가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만이 아니다. 노동은 인간이 죄를 범하고 난 후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내리신 징벌이다. 즉 노동은 인간이 죄인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 노동을 쉰다는 것은 죄에서 벗어난 존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희생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 유월절 어린양이다. 애굽을 향한 하나님의 장자 재앙에서 살아난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사람이다. 즉 이스라엘이라는 혈통이 그들을 살린 것이 아니라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향한 믿음이 있는 자들만이 살아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죄사함이 희생을 근거로 해서 주어진 것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안식일에 노동을 쉬라는 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나라는 인간의 죄를 사하신 희생을 근거로 해서 이루어진 의의 나라이며, 이 의의 나라는 인간의 노력과는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임을 고백하고 그 은혜를 기뻐하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약 속의 땅에 들어가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자기들의 노력과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셔서 하나님의 공로로 이 땅에 들어왔음을 고백하는 믿음의 표시인 것이다.
따라서 구약의 안식일의 의미는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구원된다는 것에 있기 때문에 결국 오늘날 안식일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구원을 이루신 예수님을 향하여 있는 것이고, 예수님 안에서 안식일은 완성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스스로를 안식일의 주인이라 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 안식일이 오늘날 주일이라는 의미로 그대로 넘어와서는 구약의 규례를 적용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구약의 안식일이 신약에 와서는 주일로 바뀌었다는 근거없는 말을 하면서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비성경적인 말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을 전혀 무시해 버린 것이다.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면 안식일은 자동적으로 예수님의 종이 된다. 다시 말해서 구약의 안식일은 한 날을 지키는 안식일 자체로서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 때문에 안식일이 의미가 있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 의미가 있는 것이지 안식일이라는 한 날이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의 안식일이 신약의 주일로 넘어왔다고 말한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되는가? 또 구약의 다른 절기들은 지키지 않으면서 굳이 안식일이라는 한 날을 오늘날 주일로 연결시키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금 한국교회는 맥추절, 추수절, 그리고 주일을 지킨다고 말한다. 그러면 왜 나팔절, 유월절 등 다른 절기는 지키지 않는가? 또 희년을 말할 때 과연 사고 판 땅을 원주인에게 돌려주고 빚도 탕감을 해주고 있는가? 무엇 때문에 굳이 안식일을 떼어 내서 주일과 연결시키고자 하는가? 혹시 주일을 강조해서 사람들이 예배당을 찾아오는 열심을 가지도록 하는 의도는 없는가? 구약의 안식일을 신약의 주일과 연결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모순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오늘날 교회는 공간과 시간에 거룩성을 두고 있다. 소위 성전이라는 명목 아래 단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에 불과한 건물에 거룩의 의미를 둔 것이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니까 거룩한 곳이다라는 이유를 대고 있지만 성경에 조금만 관심을 가져도 그러한 말이 얼마나 잘못된 말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부정하시고 ‘내가 성전이라’고 하신 이유를 왜 생각하지 않는가?
예배당은 그냥 건물에 불과할 뿐이다. 예배당을 성전운운하는 사람들은 결국 목사가 서서 설교하는 강대상까지 제단이라는 말도 안되는 말을 가지고 신성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구약의 완성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부정하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공간의 거룩 외에 시간의 거룩이 있다. 그것이 지금의 주일이다. 신자들은 한 주간 일곱 날 가운데 일요일 즉 주일이 하나님의 날이고 그 날이 곧 거룩한 날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이 날은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 있는 날이며 사사로이 일해서는 안되고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곧 거룩한 날을 지키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것을 주일성수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성경에 없는 규레들을 정해서 그것을 지키도록 신자들에게 요구한다. 결국 지금의 신자들은 주일에 뭘 안하는 것이 자신의 신앙을 증명하는 도구가 되어버렸고, 교회 안에서도 소위 잘지키는 사람들은 안지키는 사람들에게 큰소리치게 된 것이다.
구약이나 신약에는 특정한 시간을 거룩하게 했다는 말이 없다. 흔히 말하는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주시고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은 날이라는 시간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만약 시간을 말씀하셨다면 인간이 죄 짓기 전의 상태에서의 영원한 안식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인간이 죄 짓기 전에는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렸다. 만약 인간이 영원토록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의 다스림에 있었다면 인간은 하나님의 안식에 영원토록 참여된 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때의 안식은 하루만 안식이고 엿새는 안식이 아닌 그런 날이 아니다. 인간이 안식을 빼앗긴 것은 죄를 지은 후의 일이다. 때문에 창세기 2:3의 말씀은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즉 천지만물의 존재 상태가 곧 복과 안식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천지 만물이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안식에 동참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거룩을 입는 것이며, 영원한 복을 누리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벗어나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욕심으로 인해서 안식은 깨어지고 복과도 상관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이런 인간에게 다시금 창조의 상태를 기억하며 하나님의 의를 바라보라고 노동을 금지하는 안식일의 규례를 주신 것인데 어리석은 인간들이 시간에 거룩성을 두고 시간을 지킴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을 것으로 착각을 한 것이다.
안식은 시간이 아니라 존재상태이다. 신자가 어떻게 존재하느냐 이것이 안식과 연관이 있는 것이지 결코 시간을 지키는 것이 안식과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니다. 거룩하신 분은 하나님뿐이다. 그런데 왜 공간이나 시간에 거룩성을 두려고 하는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시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라는 명목으로 거룩의 의미를 두려고 하지만 과연 그것을 말씀하고 있는 부분이 성경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특정한 장소나 시간은 결코 복의 통로가 아니다. 예배당에 나와서 기도한다고 그 기도가 더 특별해지는 것이 아니며,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라고 해서 그 예배가 더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예수님은 예배드리는 장소를 묻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라고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하셨다. 신령과 진정이란 예배당에서 잘 훈련된 성가대와 웅장한 악기 소리가 있고 신자가 모양새 좋은 옷으로 깔끔하게 차려입고 참석한 예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령과 진정이란 자신의 죄를 알고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란 내가 성령의 다스림에 있는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성령의 다스림에 있는 자만이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령과 진정의 예배란 형식과 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복종하고 주님의 다스림에 따라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때문에 예배란 형식과 의식으로 고정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배를 형식과 의식으로 고정화시키듯 안식도 형식과 의식으로 고정화 시켜버린 것이다. 그리고 형식과 의식을 잘 지킴으로 복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시간에 의미를 두어서는 안된다. 골 2:14를 보면 “우리를 거스리시고 우리를 대적하는 모든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라고 말씀한다. 구약의 모든 규례와 문자는 십자가 안에서 다 못박혔다. 십자가가 있는 이상 이제는 그런 규례들이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알고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으로 구약에서 정해진 장소에서 제사를 드리고, 정해진 날을 지킴으로서 얻을 수 있는 거룩과 의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그리스도는 신자들이 안식일이나 주일을 지킴으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알고 십자가의 정신으로 사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이다.
이제 안식은 날을 지킴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얻어지는 것이 안식이다. 나의 죄를 담당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고 오직 십자가만으로 만족하며 사는 것이 곧 주안에 있는 것이고 그것이 안식인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하나님 같이 되고자 했던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서 빼앗겨 버린 안식이기 때문에 오직 주님만으로 만족하는 것이 곧 안식하는 것이고 이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되는 것이다. 안식은 오직 그리스도안에 있다. 어느 한 날을 지킴으로 안식을 얻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헛되게 하는 것이 된다.
신약성경에는 주일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주의 날’(계 1:10) 또는 ‘안식 후 첫날’(행 20:7)이라고만 나올 뿐이다. 안식 후 첫날은 사도행전에서 초대교회가 모였던 날을 일컫는다. 초대교회는 안식일 대신에 주일을 지키자고 한 적이 없다. 그 어느 누구도 안식일이 주일로 바뀌었다고 선언한 적이 없다. 만약 지금 교회가 주장하는 것만큼 주일을 중요한 날이었다면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주일을 강조하지 않았겠는가?
‘안식 후 첫날’이라는 것은 초대교회 당시에도 안식일을 지키는 문화가 지배적이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으며 초대교회는 굳이 안식을 폐기하고 주일을 지키는 문제에 구애를 받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초대교회는 어느 한 날에 모여서 그 날을 지킨 것이 아니었다. 초대교회는 날마다 모였던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주의 날’이라는 것도 요한이 안식 후 다음날인 주일에 계시를 받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주의 날이라는 것은 주님께서 계시하신 날이라는 의미로 봐야 한다. 즉 세상을 심판하신 심판주이신 주님이 계시하신 날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이 구약의 안식일이 신약으로 이동된 그 어떤 흔적이나 가능성을 찾아볼 수 없는데도 어느 한 날을 거룩한 날로 정해서 평소에는 자기 멋대로 살다가 그 날에 예배당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자신에게는 복이 될 것이라는 착각은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가 주일을 거룩한 날로 생각하기 때문에 주일의 오전 예배와 수요일 예배에 차별화를 두고 있는 것이다. 인간편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안식 후 첫날에 모이자고 한다면 상관없지만 그 날을 특정한 날로 정하고 그 날의 예배를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신다는 발상은 오히려 하나님께 욕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인간은 어떤 법을 지킴으로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정말 필요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왜 법을 주셨는가? 그것은 인간은 자신의 의로는 죄를 벗어날 수 없음을 알리시는 것이다. 즉 스스로를 포기하고 오직 오실 메시야를 바라보도록 하는 것이 법의 의도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법을 지켜라 그리하면 내가 복을 주겠다’가 아니라 ‘너희 스스로의 의를 버려라 그리하면 복을 주겠다’였던 것이다. 의를 버린다는 것은 우리는 무엇을 해도 그것이 나에게 결코 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우리의 의가 되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분만을 바라보고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고자 한다면 그것이 곧 의이다. 즉 의라는 것은 그리스도안에서 가능할 뿐이다. 따라서 인간이 주일성수라는 어떤 법에 매여서 그 법을 지킴으로 의를 얻고 복을 얻고자 하는 발상이 얼마나 악한 것인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주일지키는 것이 의가 된다면 주일지켜서 구원받으면 되지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필요한가?
지금 주일성수라는 것은 겨우 주일 예배에 빠지지 않는 것으로 그쳐지고 있을뿐이다. 이사야 58:13절의 말씀대로 안식일에 오락을 금하라는 말씀을 지킨다고 할 때 과연 어느 선에서 오락을 금하는가? 사사로운 말을 하지 말라고 하는데 과연 주일에 사사로운 말을 전혀 하지 않을 수 있는가? 노동을 하지 말라고 할 때 그 노동은 어느 선에서 끊어야 하는가? 주일에 어떤 사정으로 회사에 가든 일을 위해서 회사에 가는 사람들에게는 뭐라고 하는가? 결국 법적으로 한다고 해도 주일성수를 하지 못하고 있으면서 과연 주일성수를 말할 수 있는가? 인간은 하나님의 법적인 요구를 이룰 수 없는 존재임을 왜 모르는가?
흔히 하는 말이 인간은 하나님의 법을 다 이룰 수는 없지만 최대한의 노력은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야고보서 2:10절의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라는 말씀은 무엇인가? 법은 하나만 지키지 못해서 모두 지키지 못한 것으로 간주된다. 지키면 지킨만큼 칭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결국 주일에 몇가지를 지킨다고 해서 안식일의 법을 지키고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주일은 흩어져 있던 성도가 한 날을 정해서 모이는 날에 불과하다. 주일이 특별히 거룩한 날이기 때문에 모이는 것이 아니다. 부활을 기념한다고 해도 좋다. 단지 주일이래서 특별히 거룩하고 의미있는 날이라는 생각을 버리자는 것이다. 주일은 성도가 모여서 말씀을 듣고 십자가의 정신 안에서 교제하는 것이다.
주일을 귀하게 여기라는 것은 이 모임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십자가를 아는 성도들의 모임과 말씀을 사랑해서 주일에 교회에 나오는 것이고 이 모임을 위해서 세상의 일을 쉬는 것이다. 이외에 다른 의미를 두어서는 안된다. 주일이 거룩한 것이 아니고 십자가의 정신으로 모여지는 그 모임이 거룩한 것이다. 따라서 성도의 모임에도 차별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가 두려워 하노라”(갈 4:10,11)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행동하시는 반면에 인간은 자기를 중심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자기를 중심으로 행동하는 인간의 자아가 결국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기 때문에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죄를 고발하여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깨닫게 함으로 자기에 대해서 절망하게 하고 상대적으로 구원자 되시는 그리스도를 향해서 눈을 뜨게 하는 기적이 있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가에만 관심을 두어야 한다. 그러나 자기 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생각하면 결국 말씀은 나를 사랑하고, 나를 유익하게 하고, 나를 복주는 진리 아닌 말씀으로 전락되고 만다. 오늘날 현대교회가 진리 아닌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 교회 중심으로 흘러가는 이유도 말씀을 자기 중심으로 대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생명으로 이끌고자 하신다. 생명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말씀을 남겨 놓으셨다. 그런데 인간은 말씀을 통해서 생명을 얻고자 주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애초부터 인간의 생존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셨다.
생존의 욕구는 생명을 찾아가는 데 장애물이다. 인간이 생존의 문제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면 생명에 대한 관심을 희박해지게 되어 있다. 만약 생존의 욕구를 포기하지 못한채 생명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나는 단호하게 그 생명은 가짜 생명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은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고 말씀하셨다. 생명과 생존은 서로 공존하고 도와주는 관계가 아니라 대치되며 타협할 수 없는 관계이다. 왜냐하면 생존에 대한 관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법칙에 도전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다. 하나님의 계획은 생명이지 생존이 아니다. 때문에 지금 자신의 환경과 형편이 곧 나에 대한 하나님의 최상의 계획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 사랑안에서 생존의 욕구를 가지고 있을 때 나오는 것은 인생에 대한 자신의 계획이고 목표이다. 그럴 때 인간은 자연히 하나님이 주시는 환경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환경을 하나님께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종교적인 열심을 가미시키게 된다.
자신의 종교열심이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을거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도전이다. 그리고 이들이 말하는 생명은 자신의 생존의 문제에 대한 성취가 포함된 생명이기 때문에 가짜 생명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하신 것이나 오늘날 신자들을 세상에서 끄집어 내신 이유는 오직 하나,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생명에 장애가 되는 생존의 문제에 관심을 두고 계시겠는가? 결국 하나님은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 복을 주시고 우리를 지켜주신다고 생각하는 그 발상부터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는 모습임을 알아야 한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 우리는 성경 앞에서는 피조물에 불과함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말씀으로 지음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피조물은 말씀앞에서는 권리를 내세울 수 없다. 때문에 피조물이 가장 피조물 다운 것은 오로지 말씀이 명령하는대로 순종할 때이다.
인간은 피조물로서의 입장을 잘 알아야 한다. 피조물은 창조주와 거래할 수 없다. 창조주 또한 피조물과 어떤 거래도 요구하신 적이 없다. ‘하나님께 잘할 테니까 복주십시오’ 이것은 피조물로서 자기 위치를 잊어버린 교만한 태도이다. 피조물은 창조주가 주면 준대로 받아 살 뿐이다. 적게 줬다고 불평할 수도 없는 것이 바로 피조물인 인간이다.
살려주면 살려주시는 대로 감사하고 살아가는 것이 피조물다운 모습이고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인생의 계획과 목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자기 인생이 좋다 나쁘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 피조물이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손에 있는데 어떻게 우리가 감히 하나님께 내 뜻을 요구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을 안다면 성경을 자기중심적인 시각에서 보지 않게 될 것이다.
성경을 자신의 생존, 세상을 향한 자기의 포부와 꿈을 포기하지 않은채 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거래의 관계로 끌고가는 것이다. 즉 내가 말씀대로 지키고 열심히 하면 하나님은 나를 도와주실 것이다는 착각이다.
인간은 ‘주어진대로 살아라’는 말에는 참지를 못한다. ‘나도 힘이 있고 얼마든지 내 힘으로 할 수 있는데 주어진대로 살아라니 이것은 내 힘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박한다. ‘내 재능과 내 열심을 가지고 얼마든지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다.’ ‘지금 나에게 있는 지위와 재물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이 타락된 인간의 모습이다.
이런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보니까 결국은 ‘얼마든지 시키십시오. 다 해내겠습니다’는 쪽으로 나아간다. 그리고는 ‘하라는대로 할테니 대신 하나님은 이것을 주십시오’하고 자신의 요구사항을 제시하고 또는 열심히 안한 것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에게 내릴지 모르는 벌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이 피조물의 입장인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많은 규레들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규레를 지키는 사람만 구원하시겠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규레를 통해서 인간의 죄인됨과 무능력함을 알게 하시고 구원자 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신다. 결국 규례, 즉 율법은 복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지 행함의 조건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율법이 복음을 나타낸다는 것은 율법이 지향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율법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절기들도 결국 그리스도를 지향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따라서 율법 가운데 하나인 안식일의 문제도 그리스도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으로 율법의 역할은 끝났다는 의미다. 율법이 증거하기를 원했던 복음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이상 이제 율법은 그리스도안으로 그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했다. 그것은 지키는 것이 의가 되기 때문이 아니라 율법을 통해서 그들이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바로 알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즉 안식일에 노동을 하지 말라고 하셨으면 노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왜 노동을 하지 않아야 하는지 그 의미를 알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의로 여긴 것이다.
성경에서 최초의 안식은 천지창조와 더불어 시작한다. 즉 하나님의 안식은 세상이 태초에 하나님이 만드신 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결국 하나님이 만드신 처음 모습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안식을 깨드리는 행위이고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겠다는 것도 세상이 하나님이 만드신 처음 모습 그대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안식은 하나님의 기쁨의 날이다. 하나님의 기쁨은 세상이 처음의 모습을 유지함으로 지속된다. 그러나 인간은 처음의 모습에서 벗어나게 된다.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서 은혜로만 살아야할 인간이 자기에게 관심을 갖게 되고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벗어나게 된다. 이로 인해서 하나님의 안식은 깨어지게 된다.
이제 하나님은 처음의 모습을 잃어버린 기존의 것은 버리고 새로운 창조의 일을 하시고자 하신다.이 새로운 창조 안에 하나님은 새로운 인간의 탄생도 함께 포함하고 계신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의 구속사역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것을 목표로 하고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모든 규례 또한 구속사역을 지향하고 주어진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안식일은 하나님의 구속사역 안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안식일에 노동을 하지 말라고 하신다. 노동은 생존과 연관되어 있다. 사람은 생존을 위해서 일한다. 그런데 안식일에 노동을 쉬라는 것은 단지 휴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은 일단 인간의 생존에 대한 욕구를 끊어버리고 출발한다는 것이다. 만약 이것을 무시한다면 심판을 받게 된다. 법을 어겼기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지향하는 정신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안식일에 노동을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 은혜를 감사하기 위해서이다.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내 힘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고백을 위해서 노동을 쉬라는 것이다. 이 행위가 곧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안식이란 상대적으로 모든 세계는 오직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보존되고 있음을 고백하고 확인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런데 노동을 계속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보존된다는 것을 무시하고 결국 자기의 힘으로 자기를 보존시키고자 하는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안식일은 인간이 무엇때문에 심판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는 날이기도 하다.
그러나 노동을 쉬라는 것이 단지 내가 먹고 사는 문제가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만이 아니다. 노동은 인간이 죄를 범하고 난 후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내리신 징벌이다. 즉 노동은 인간이 죄인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 노동을 쉰다는 것은 죄에서 벗어난 존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희생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 유월절 어린양이다. 애굽을 향한 하나님의 장자 재앙에서 살아난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사람이다. 즉 이스라엘이라는 혈통이 그들을 살린 것이 아니라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향한 믿음이 있는 자들만이 살아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죄사함이 희생을 근거로 해서 주어진 것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안식일에 노동을 쉬라는 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나라는 인간의 죄를 사하신 희생을 근거로 해서 이루어진 의의 나라이며, 이 의의 나라는 인간의 노력과는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임을 고백하고 그 은혜를 기뻐하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약 속의 땅에 들어가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자기들의 노력과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셔서 하나님의 공로로 이 땅에 들어왔음을 고백하는 믿음의 표시인 것이다.
따라서 구약의 안식일의 의미는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구원된다는 것에 있기 때문에 결국 오늘날 안식일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구원을 이루신 예수님을 향하여 있는 것이고, 예수님 안에서 안식일은 완성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스스로를 안식일의 주인이라 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 안식일이 오늘날 주일이라는 의미로 그대로 넘어와서는 구약의 규례를 적용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구약의 안식일이 신약에 와서는 주일로 바뀌었다는 근거없는 말을 하면서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비성경적인 말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을 전혀 무시해 버린 것이다.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면 안식일은 자동적으로 예수님의 종이 된다. 다시 말해서 구약의 안식일은 한 날을 지키는 안식일 자체로서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 때문에 안식일이 의미가 있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 의미가 있는 것이지 안식일이라는 한 날이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의 안식일이 신약의 주일로 넘어왔다고 말한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되는가? 또 구약의 다른 절기들은 지키지 않으면서 굳이 안식일이라는 한 날을 오늘날 주일로 연결시키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금 한국교회는 맥추절, 추수절, 그리고 주일을 지킨다고 말한다. 그러면 왜 나팔절, 유월절 등 다른 절기는 지키지 않는가? 또 희년을 말할 때 과연 사고 판 땅을 원주인에게 돌려주고 빚도 탕감을 해주고 있는가? 무엇 때문에 굳이 안식일을 떼어 내서 주일과 연결시키고자 하는가? 혹시 주일을 강조해서 사람들이 예배당을 찾아오는 열심을 가지도록 하는 의도는 없는가? 구약의 안식일을 신약의 주일과 연결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모순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오늘날 교회는 공간과 시간에 거룩성을 두고 있다. 소위 성전이라는 명목 아래 단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에 불과한 건물에 거룩의 의미를 둔 것이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니까 거룩한 곳이다라는 이유를 대고 있지만 성경에 조금만 관심을 가져도 그러한 말이 얼마나 잘못된 말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부정하시고 ‘내가 성전이라’고 하신 이유를 왜 생각하지 않는가?
예배당은 그냥 건물에 불과할 뿐이다. 예배당을 성전운운하는 사람들은 결국 목사가 서서 설교하는 강대상까지 제단이라는 말도 안되는 말을 가지고 신성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구약의 완성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부정하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공간의 거룩 외에 시간의 거룩이 있다. 그것이 지금의 주일이다. 신자들은 한 주간 일곱 날 가운데 일요일 즉 주일이 하나님의 날이고 그 날이 곧 거룩한 날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이 날은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 있는 날이며 사사로이 일해서는 안되고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곧 거룩한 날을 지키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것을 주일성수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성경에 없는 규레들을 정해서 그것을 지키도록 신자들에게 요구한다. 결국 지금의 신자들은 주일에 뭘 안하는 것이 자신의 신앙을 증명하는 도구가 되어버렸고, 교회 안에서도 소위 잘지키는 사람들은 안지키는 사람들에게 큰소리치게 된 것이다.
구약이나 신약에는 특정한 시간을 거룩하게 했다는 말이 없다. 흔히 말하는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주시고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은 날이라는 시간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만약 시간을 말씀하셨다면 인간이 죄 짓기 전의 상태에서의 영원한 안식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인간이 죄 짓기 전에는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렸다. 만약 인간이 영원토록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의 다스림에 있었다면 인간은 하나님의 안식에 영원토록 참여된 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때의 안식은 하루만 안식이고 엿새는 안식이 아닌 그런 날이 아니다. 인간이 안식을 빼앗긴 것은 죄를 지은 후의 일이다. 때문에 창세기 2:3의 말씀은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즉 천지만물의 존재 상태가 곧 복과 안식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천지 만물이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안식에 동참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거룩을 입는 것이며, 영원한 복을 누리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벗어나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욕심으로 인해서 안식은 깨어지고 복과도 상관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이런 인간에게 다시금 창조의 상태를 기억하며 하나님의 의를 바라보라고 노동을 금지하는 안식일의 규례를 주신 것인데 어리석은 인간들이 시간에 거룩성을 두고 시간을 지킴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을 것으로 착각을 한 것이다.
안식은 시간이 아니라 존재상태이다. 신자가 어떻게 존재하느냐 이것이 안식과 연관이 있는 것이지 결코 시간을 지키는 것이 안식과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니다. 거룩하신 분은 하나님뿐이다. 그런데 왜 공간이나 시간에 거룩성을 두려고 하는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시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라는 명목으로 거룩의 의미를 두려고 하지만 과연 그것을 말씀하고 있는 부분이 성경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특정한 장소나 시간은 결코 복의 통로가 아니다. 예배당에 나와서 기도한다고 그 기도가 더 특별해지는 것이 아니며,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라고 해서 그 예배가 더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예수님은 예배드리는 장소를 묻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라고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하셨다. 신령과 진정이란 예배당에서 잘 훈련된 성가대와 웅장한 악기 소리가 있고 신자가 모양새 좋은 옷으로 깔끔하게 차려입고 참석한 예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령과 진정이란 자신의 죄를 알고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란 내가 성령의 다스림에 있는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성령의 다스림에 있는 자만이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령과 진정의 예배란 형식과 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복종하고 주님의 다스림에 따라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때문에 예배란 형식과 의식으로 고정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배를 형식과 의식으로 고정화시키듯 안식도 형식과 의식으로 고정화 시켜버린 것이다. 그리고 형식과 의식을 잘 지킴으로 복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시간에 의미를 두어서는 안된다. 골 2:14를 보면 “우리를 거스리시고 우리를 대적하는 모든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라고 말씀한다. 구약의 모든 규례와 문자는 십자가 안에서 다 못박혔다. 십자가가 있는 이상 이제는 그런 규례들이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알고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으로 구약에서 정해진 장소에서 제사를 드리고, 정해진 날을 지킴으로서 얻을 수 있는 거룩과 의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그리스도는 신자들이 안식일이나 주일을 지킴으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알고 십자가의 정신으로 사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이다.
이제 안식은 날을 지킴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얻어지는 것이 안식이다. 나의 죄를 담당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고 오직 십자가만으로 만족하며 사는 것이 곧 주안에 있는 것이고 그것이 안식인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하나님 같이 되고자 했던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서 빼앗겨 버린 안식이기 때문에 오직 주님만으로 만족하는 것이 곧 안식하는 것이고 이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되는 것이다. 안식은 오직 그리스도안에 있다. 어느 한 날을 지킴으로 안식을 얻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헛되게 하는 것이 된다.
신약성경에는 주일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주의 날’(계 1:10) 또는 ‘안식 후 첫날’(행 20:7)이라고만 나올 뿐이다. 안식 후 첫날은 사도행전에서 초대교회가 모였던 날을 일컫는다. 초대교회는 안식일 대신에 주일을 지키자고 한 적이 없다. 그 어느 누구도 안식일이 주일로 바뀌었다고 선언한 적이 없다. 만약 지금 교회가 주장하는 것만큼 주일을 중요한 날이었다면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주일을 강조하지 않았겠는가?
‘안식 후 첫날’이라는 것은 초대교회 당시에도 안식일을 지키는 문화가 지배적이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으며 초대교회는 굳이 안식을 폐기하고 주일을 지키는 문제에 구애를 받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초대교회는 어느 한 날에 모여서 그 날을 지킨 것이 아니었다. 초대교회는 날마다 모였던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주의 날’이라는 것도 요한이 안식 후 다음날인 주일에 계시를 받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주의 날이라는 것은 주님께서 계시하신 날이라는 의미로 봐야 한다. 즉 세상을 심판하신 심판주이신 주님이 계시하신 날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이 구약의 안식일이 신약으로 이동된 그 어떤 흔적이나 가능성을 찾아볼 수 없는데도 어느 한 날을 거룩한 날로 정해서 평소에는 자기 멋대로 살다가 그 날에 예배당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자신에게는 복이 될 것이라는 착각은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가 주일을 거룩한 날로 생각하기 때문에 주일의 오전 예배와 수요일 예배에 차별화를 두고 있는 것이다. 인간편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안식 후 첫날에 모이자고 한다면 상관없지만 그 날을 특정한 날로 정하고 그 날의 예배를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신다는 발상은 오히려 하나님께 욕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인간은 어떤 법을 지킴으로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정말 필요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왜 법을 주셨는가? 그것은 인간은 자신의 의로는 죄를 벗어날 수 없음을 알리시는 것이다. 즉 스스로를 포기하고 오직 오실 메시야를 바라보도록 하는 것이 법의 의도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법을 지켜라 그리하면 내가 복을 주겠다’가 아니라 ‘너희 스스로의 의를 버려라 그리하면 복을 주겠다’였던 것이다. 의를 버린다는 것은 우리는 무엇을 해도 그것이 나에게 결코 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우리의 의가 되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분만을 바라보고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고자 한다면 그것이 곧 의이다. 즉 의라는 것은 그리스도안에서 가능할 뿐이다. 따라서 인간이 주일성수라는 어떤 법에 매여서 그 법을 지킴으로 의를 얻고 복을 얻고자 하는 발상이 얼마나 악한 것인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주일지키는 것이 의가 된다면 주일지켜서 구원받으면 되지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필요한가?
지금 주일성수라는 것은 겨우 주일 예배에 빠지지 않는 것으로 그쳐지고 있을뿐이다. 이사야 58:13절의 말씀대로 안식일에 오락을 금하라는 말씀을 지킨다고 할 때 과연 어느 선에서 오락을 금하는가? 사사로운 말을 하지 말라고 하는데 과연 주일에 사사로운 말을 전혀 하지 않을 수 있는가? 노동을 하지 말라고 할 때 그 노동은 어느 선에서 끊어야 하는가? 주일에 어떤 사정으로 회사에 가든 일을 위해서 회사에 가는 사람들에게는 뭐라고 하는가? 결국 법적으로 한다고 해도 주일성수를 하지 못하고 있으면서 과연 주일성수를 말할 수 있는가? 인간은 하나님의 법적인 요구를 이룰 수 없는 존재임을 왜 모르는가?
흔히 하는 말이 인간은 하나님의 법을 다 이룰 수는 없지만 최대한의 노력은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야고보서 2:10절의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라는 말씀은 무엇인가? 법은 하나만 지키지 못해서 모두 지키지 못한 것으로 간주된다. 지키면 지킨만큼 칭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결국 주일에 몇가지를 지킨다고 해서 안식일의 법을 지키고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주일은 흩어져 있던 성도가 한 날을 정해서 모이는 날에 불과하다. 주일이 특별히 거룩한 날이기 때문에 모이는 것이 아니다. 부활을 기념한다고 해도 좋다. 단지 주일이래서 특별히 거룩하고 의미있는 날이라는 생각을 버리자는 것이다. 주일은 성도가 모여서 말씀을 듣고 십자가의 정신 안에서 교제하는 것이다.
주일을 귀하게 여기라는 것은 이 모임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십자가를 아는 성도들의 모임과 말씀을 사랑해서 주일에 교회에 나오는 것이고 이 모임을 위해서 세상의 일을 쉬는 것이다. 이외에 다른 의미를 두어서는 안된다. 주일이 거룩한 것이 아니고 십자가의 정신으로 모여지는 그 모임이 거룩한 것이다. 따라서 성도의 모임에도 차별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가 두려워 하노라”(갈 4: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