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4.01 15:54

(20강) 원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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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5:15-23http://onlycross.net/videos/exo/exo-051523.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5.이스라엘 자손의 기록원들이 가서 바로에게 호소하여 이르되 왕은 어찌하여 당신의 종들에게 이같이 하시나이까

16.당신의 종들에게 짚을 주지 아니하고 그들이 우리에게 벽돌을 만들라 하나이다 당신의 종들이 매를 맞사오니 이는 당신의 백성의 죄니이다

17.바로가 이르되 너희가 게으르다 게으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자 하는도다

18.이제 가서 일하라 짚은 너희에게 주지 않을지라도 벽돌은 너희가 수량대로 바칠지니라

19.기록하는 일을 맡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너희가 매일 만드는 벽돌을 조금도 감하지 못하리라 함을 듣고 화가 몸에 미친 줄 알고

20.그들이 바로를 떠나 나올 때에 모세와 아론이 길에 서 있는 것을 보고

21.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를 바로의 눈과 그의 신하의 눈에 미운 것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살피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22.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아뢰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23.내가 바로에게 들어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한 후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설교>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삶이 힘들어지면 이 생각이 흔들리면서 원망으로 변합니다. 자신이 힘들어진 것에 대한 반발과 함께 부당함을 토로하게 되고 하나님이 계신다면 힘든 상황이 끝나고 평안이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대개의 기독교인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존재 이유고 일하시는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단적으로 말씀드리면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원망을 속에 품고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증거는 누구도 현재에 대해 만족하지도 감사하지도 않고 늘 아쉬워하면서 부족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현재에 대해 아쉬워하는 마음이 있으면서도 ‘은혜로 산다’고 말하는 것은 결국 믿음의 위선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현재에 대해 아쉬워하는 마음이 있으면서도 은혜를 말하는 것은 모두 거짓이고 위선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은혜에 대한 이해가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평안한 환경의 삶을 살게 하는 은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늘 아쉬워하며 살아가는 나 같은 자를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시고 예수님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덮으시고 용서하신 그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원망과 불평의 자리로 밀어 넣으신 다음에 끌어가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광야 사흘 길쯤 가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바로는 이스라엘의 노동을 더 무겁게 해버립니다. 이스라엘이 모세의 말에 선동되지 않게 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일을 힘들게 하면 다른 생각을 품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의 생각인 것입니다.

 

 

무거운 노동으로 힘들게 되자 이스라엘 자손의 기록원들이 바로를 찾아가서 노동의 무거움을 호소하지만 바로는 듣지를 않고 “너희가 게으르다 게으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자 하는도다 이제 가서 일하라 짚은 너희에게 주지 않을지라도 벽돌은 너희가 수량대로 바칠지니라”(17,18절)는 말로 이스라엘 자손이 힘들어진 이유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자고 한 말에 있음을 밝힙니다.

 

 

바로의 말을 들은 기록원들이 무엇을 생각했겠습니까? 자신들이 무거운 노동으로 고생을 하게 된 것이 모세와 아론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원망과 불평은 모세와 아론에게로 향하게 됩니다. ‘너희가 바로를 만나서 여호와께 제사 드리겠다고 한 것 때문에 우리가 고생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원망은 20-21절에서 드러납니다.

 

 

이들은 모세와 아론이 찾아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는 하나님이 자신들을 살피시고 고생에서 구원하기 위해 모세와 아론을 보내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경배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고생이 끝나거나 줄어들기는커녕 더 무거워진 것 때문에 모세와 아론을 하나님이 보낸 자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람은 몸이 힘들어지거나 편치 못할 때 원망이 나옵니다. 날씨가 더우면 덥다고 원망하고 추우면 춥다고 원망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가장 잘하는 것이 원망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렇게 보면 이스라엘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는 것도 모세가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도 인간이 가장 잘하는 것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바로를 완악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바로의 마음을 충동질하여 이스라엘의 노동을 더 힘들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왜 그렇게 하십니까?’라고 반발하거나 항변할 수 없습니다. 힘들면 힘든 대로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 피조물 된 우리의 존재 위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몸을 편하게 해 주셔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잘 한 것이 없는 것도 이유이겠지만, 설사 욥처럼 완벽하다 할 정도로 잘한 것이 있다 해도 ‘나를 편하게 해주십시오’라고 말할 이유도 근거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몸이 편치 않으면 그것을 하나님의 부당함으로 여기며 원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 몸의 편함을 위해 살아갈 때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나의 편함만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날 위해 죽으신 것은 감사한데 그래도 나의 편함만은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심보로 원망과 불평을 일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는 그런 우리까지 안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은혜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되고 그 사랑이 나 같은 자도 붙들고 있음을 깨달을 때 비로소 내 몸이 편하게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중요하고 예수 안에서 예수를 믿는 자로 사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사는 것입니다.

 

 

22,23절을 보면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아뢰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내가 바로에게 들어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한 후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라고 모세가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모세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 부당하다고 여겨졌을 것입니다. 애굽으로 가지 않겠다는 자신을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애굽으로 가기만 하면 하나님이 학대 받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며 모든 일이 순탄하게 될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더 학대를 받게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지 않음으로 모든 원망이 자신에게 향한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모세도 하나님의 구원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도 생각지도 않습니다. 자신들이 힘들 때 찾아와서 구원해 주는 하나님만 생각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죄인 것을 모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이스라엘이라는 존재에 대해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학대를 받는 데도 불구하고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침묵하시는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18,19절의 “이제 가서 일하라 짚은 너희에게 주지 않을지라도 벽돌은 너희가 수량대로 바칠지니라 기록하는 일을 맡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너희가 매일 만드는 벽돌을 조금도 감하지 못하리라 함을 듣고 화가 몸에 미친 줄 알고”라는 말을 보면 이들은 바로가 벽돌의 수량을 조금이라도 감해주면 살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만약 바로가 그렇게 조치했다면 아마 그들에게 바로는 은혜를 베푼 자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몸을 편하게 해주는 것을 은혜를 베푸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의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보다 몸을 편하게 해주는 은혜가 더 크게 다가오고 더 많이 실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지금의 기독교인들에게 십자가 은혜는 참으로 생소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생소한 은혜일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은 생소한 것으로 다가오고 종교는 아주 익숙한 것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이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이 되게 하기 위해 더 중한 학대로 밀어 넣는 것입니다. 학대로 말미암아 원망과 불평이 나오게 하시고 그런 이스라엘이 품고 약속의 땅으로 가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죄로 인해서 증거됩니다. 따라서 은혜와 사랑이 증거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죄인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속에 자리하고 있는 죄가 낱낱이 드러나 지도록 끌어가시는 것입니다.

 

 

신자는 죄가 드러나는 길에서 자기의 죄를 보며 비로소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왜 저주가 되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저주 받을 자임을 알게 되면서 하나님의 사랑 없이는 존재할 수 없음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편하게 사는 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나 같은 자를 예수님이 기억하신다면 그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은혜이고 복입니다. 이 은혜로 감사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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