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4.08 17:15

(21강) 나는 여호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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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6:1-5http://onlycross.net/videos/exo/exo-060105.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그의 땅에서 쫓아내리라

2.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이니라

3.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4.가나안 땅 곧 그들이 거류하는 땅을 그들에게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5.이제 애굽 사람이 종으로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 소리를 내가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설교>

현실과 비현실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성경의 이야기는 비현실적인 것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우리의 현실에 대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비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우리가 추구하고 꿈꾸는 현실이 성경에서 어긋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현실을 기대합니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거의 하나로 모아질 것입니다. 그것은 풍족한 소비가 있는 삶입니다. 사람은 무엇에도 구애 받지 않은 자유로운 소비가 있는 삶에 행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소비를 위해서는 그만큼의 소득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소득이 부족하기 때문에 자연히 소비에 제약을 받게 되면서 자신의 현재에 대해 불만이 쌓이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성경의 이야기들은 우리의 소득과 무관합니다. 성경의 이야기를 아무리 집중해서 듣고 또 들어도 소득은 늘지 않습니다. 성경의 내용들이 소득과 즉 복과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말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것은 성경의 의도와 무관합니다. 마치 성경이라는 탈을 쓰고 이벤트를 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성경의 이야기는 우리의 현실에 대해 얘기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면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하늘의 것이 아닌 눈에 보이는 세상에 붙들려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절에 보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말씀합니다. 6절에서도 “나는 여호와라”고 말씀하고 7절에서도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여호와라는 사실을 왜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우리는 하나님이 여호와고 여호와가 곧 하나님이라고만 생각합니다. 다만 호칭이 다를 뿐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이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과 여호와가 호칭의 문제일 뿐이라면 모세에게 ‘나는 여호와이니라’라는 말로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강조할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호칭에 신경을 쓰는 분도 아닙니다.

 

 

지금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애굽으로 가서 바로를 만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 때문에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모세의 말을 들은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을 더 학대하였고, 그로 인해서 모세가 백성들로부터 원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모세 입장에서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모세가 자청해서 애굽으로 가겠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강권에 의해 가게 된 것이고, 분명히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출 3:9-10절의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는 말씀대로 라면 모세가 애굽으로 가서 바로를 만남으로 이스라엘은 고난에서 건짐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고난이 더 커지는 상황에서 모세도 답을 찾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아뢰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내가 바로에게 들어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한 후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출 5:22-23)는 말로 하나님께 항변을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모세도 학대 받는 고난에서 건짐 받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것이 모세를 보내신 이유고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이스라엘의 구원에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알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3절을 보면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전능의 하나님은 알았지만 여호와는 몰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라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창 13:4절에서는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제사하면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것입니다.

 

 

또한 창 26:25절을 보면 이삭 역시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말합니다. 야곱도 다르지 않습니다. 심지어 창 9:26절에서는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고 노아가 말합니다. 즉 노아도 여호와라는 이름을 알았고 부른 것입니다. 때문에 자자손손 대대로 하나님을 여호와로 알며 부르고 제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는 여호와로 알리지 않았다고 하시는 것일까요?

 

 

모세가 바로를 만나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 바로는 ‘여호와가 누구이기에’라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여호와를 자신의 현실과 전혀 무관한 존재로 치부한 것입니다. 즉 바로 입장에서 여호와라는 신의 말을 들어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4,5절을 보면 “가나안 땅 곧 그들이 거류하는 땅을 그들에게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이제 애굽 사람이 종으로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 소리를 내가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대로 하나님은 언약을 세우시고 언약대로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이스라엘을 붙들고 있는 애굽은 심판을 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심판이 곧 애굽의 현실이 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바로는 여호와의 심판을 묵살하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의 현실이 계속 지속될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험악한 세상의 삶에서 지켜주고 복이 되는 길로 인도하시는 전능의 하나님으로 알고 믿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고대 사회부터 동일합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생각했던 하나님도 다르지 않습니다. 여호와를 부르든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든 신에 대한 인식은 동일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전능한 하나님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이들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전능은 언약을 세우시고 언약을 이루시는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출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전능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도 여호와로서의 일은 알지 못했습니다.

 

 

6,7절을 보면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처럼 여호와는 자기 백성을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으로부터 빼내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후손을 번성하게 하신다는 약속은 받았지만, 후손을 어떻게 번성하게 하시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습니다. 바로 그 분이 여호와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스라엘은 더욱 더 무거운 고난의 현장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무거운 고난에서 건짐을 받을 때 언약을 이루시는 여호와가 누구신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애굽의 학대에서 건져 주실 것만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세상이 알고 있는 신에 대한 개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더 큰 학대를 받게 하심으로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님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나의 삶을 위해 일하는 하나님은 우상일 뿐입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알 수 있는 하나님은 언약을 세우고 언약대로 일하시는 분입니다. 자기 백성을 죄의 권세로부터 건져 내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아는 신자는 곧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을 아는 사람이고, 그에게는 자기 의가 없고 하나님의 행하심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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