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7.29 16:51

(35강) 경고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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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9:13-21http://onlycross.net/videos/exo/exo-091321.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3.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바로 앞에 서서 그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14.내가 이번에는 모든 재앙을 너와 네 신하와 네 백성에게 내려 온 천하에 나와 같은 자가 없음을 네가 알게 하리라

15.내가 손을 펴서 돌림병으로 너와 네 백성을 쳤더라면 네가 세상에서 끊어졌을 것이나

16.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17.네가 여전히 내 백성 앞에 교만하여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느냐

18.내일 이맘때면 내가 무거운 우박을 내리리니 애굽 나라가 세워진 그 날로부터 지금까지 그와 같은 일이 없었더라

19.이제 사람을 보내어 네 가축과 네 들에 있는 것을 다 모으라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릇 들에 있어서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들에게는 우박이 그 위에 내리리니 그것들이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20.바로의 신하 중에 여호와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그 종들과 가축을 집으로 피하여 들였으나

21.여호와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 사람은 그의 종들과 가축을 들에 그대로 두었더라

 

 

<설교>

애굽에 재앙이 반복되면서 우리는 다양한 반응들을 보게 됩니다. 나일 강이 피가 되는 재앙에서 애굽의 요술사들도 흉내를 내고 그로 인해서 바로는 재앙을 무시하고 관심도 가지지 않습니다. 개구리 재앙에서는 요술사들도 역시 흉내를 내었으나 개구리로 인한 문제를 견디다 못한 바로가 백성을 보내 줄테니 자신을 위해 여호와께 간구해 달라고 부탁을 하지만 다시 마음이 돌변합니다.

 

 

이 재앙에서는 요술사들이 자기 요술로 흉내를 낼 수 없게 되자 재앙이 하나님의 권능임을 깨닫고 바로에게 말하지만 바로는 여전히 완악함으로 반응합니다. 파리 재앙에서는 바로가 애굽 땅에서 제사 드릴 것을 제안하며 타협 하려고 하지만 모세가 거절합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우박 재앙에 대한 경고를 듣고 바로는 여전히 마음의 완악함을 보이지만 신하 중에는 말씀을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들에 있는 종들과 가축을 집으로 피하여 들이지만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아니한 사람은 종과 가축을 그대로 들에 둡니다.

 

 

과연 바로와 애굽 사람의 이러한 반응이 보여주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금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바로처럼 애굽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완악한 마음으로 반응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는 자로 자부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겉과 속이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을 향해 ‘회칠한 무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는 보기에 좋았지만 그 속은 더러움으로 가득한 것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속을 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실천으로 드러나는 겉을 보면서 우월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에 대한 책망입니다.

 

 

하나님은 겉이 아니라 속에 대해 심판을 하십니다. 겉으로 드러난 행위를 문제 삼으신 것이 아니라 속의 악함과 더러움을 문제 삼으시고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겉으로 가려진 속을 보지 못했고 지금의 기독교인 역시 드러나고 보이는 겉만 좋으면 된다고 생각할 뿐 속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겉이 좋아야 믿음이 좋은 것으로 인정되고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바로 앞에 서서 그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재앙이 있을 때마다 반복되는 동일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 대한 바로의 반응 또한 말씀을 무시하는 것으로 반복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은 왜 악한 자를 심판하지 않고 남겨 두시는가?’라는 의문이 자리하기도 합니다.

 

 

이 의문은 지금의 기독교인들에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악한 자들을 심판하지 않고 보존하시는 것이나 그들이 오히려 풍족한 삶을 사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심판과 의로우심에 의문을 갖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심판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러한 기대에서 벗어나 있기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을 하면서도 하나님이 존재를 부인하는 이방인과 다를 바 없는 삶을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의문에 대해 이미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16절)는 말씀으로 답을 하셨습니다.

 

 

바로를 세워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시고 그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로가 하나님의 이름을 전파하는 하나님의 일에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가 그의 완악함에도 불구하고 보존되는 이유입니다.

 

 

바울도 롬 9:17절에서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바로로 말미암아 보이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바로로 인해서 세상에 증거 된 하나님의 능력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롬 9:18절의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는 말씀대로 구원될 수 없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15절에서 “내가 손을 펴서 돌림병으로 너와 네 백성을 쳤더라면 네가 세상에서 끊어졌을 것이나”라고 말씀하는 것은 애굽은 이미 세상에서 끊어졌어야 할 심판의 존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돌림병으로 애굽의 모든 가축을 죽이신 것으로 보이셨습니다. 애굽은 세상에서 끊어져야 할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애굽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애굽에 거주하고 있는 이스라엘도 애굽의 속성을 그대로 가지고 살아갑니다. 즉 말은 이스라엘이지만 속은 애굽과 동일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도 애굽으로 간주되어 세상에서 끊어져야 할 존재들일 뿐입니다.

 

 

그런데 돌림병 재앙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은 하나도 죽지 않습니다. 이 일이 겉으로 보면 마치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재물을 보호해 주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겉을 보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자의 재산을 지켜주는 분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을 죽이지 않은 것은 이스라엘도 애굽과 동일하게 세상에서 끊어져야 할 악한 존재이지만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심으로 생명에 있음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바로의 완악함은 인간의 완악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지 않고 말씀에 복종하지 않을 인간됨이 바로를 통해서 증거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에 대한 인간의 공통된 반응은 무시입니다.

 

 

그런데 20,21절을 보면 “바로의 신하 중에 여호와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그 종들과 가축을 집으로 피하여 들였으나 여호와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 사람은 그의 종들과 가축을 들에 그대로 두었더라”고 말합니다.

 

 

재앙에 대한 말씀이 주어졌을 때 애굽 사람은 둘로 구분됩니다. 한 무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이 될 것을 알고 두려워하여 들에 있는 종과 가축을 집으로 피하여 들입니다. 다른 한 무리는 하나님이 말씀은 말씀일 뿐 현실과 무관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들에 있는 종과 가축을 그대로 두는 것입니다.

 

 

바로의 신하 중에 여호와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가 있는 것을 우연이거나 그럴 수도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으면서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보면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말씀을 무시하는 바로의 신하가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바로의 신하 중에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가 있게 된 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이 인간의 본래 속성인데 그런 인간들 속에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가 존재한다는 것이 하나님이 능력으로 일하고 계심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하나님의 말씀에도 설득당하지 않을 만큼 완악한 마음의 인간이 마음에 말씀을 두게 되고 말씀을 두려워하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장자 재앙에서도 살아난 사람은 단순히 이스라엘 자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의지와 판단으로 문설주에 피를 바른 것이 아니라 말씀이 곧 현실임을 알게 하시고 말씀대로 행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예수의 피로써 죄가 용서되고 거룩한 신분에 참여하게 된 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것을 믿는 그가 바로 신자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자신의 행함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하나님의 일하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애굽의 속성으로부터 나오게 된 신자의 출애굽입니다.

 

 

보이는 것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확인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십자가를 믿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것일 뿐입니다. 바로와 같은 완악한 마음의 우리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둘 수 있는지를 생각하시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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