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4.15 16:48

(22강) 듣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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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6:6-9http://onlycross.net/videos/exo/exo-060609.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6.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

7.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8.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하셨다 하라

9.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가혹한 노역으로 말미암아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더라

 

<설교>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을 배경으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만약 약속을 간과하고 해석하게 되면 그 해석은 인간의 종교적 속성에 합류되어 인간이 중심이 된 내용으로 채워질 뿐입니다. 이것이 현대 교회가 인간적으로 흘러가는 주된 이유입니다. 교회가 ‘오직 성경’이라는 말을 하면서도 어떤 오류에 빠져 있는지를 감지하지 못하고 종교를 신앙으로 착각하는 결과만 초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십자가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대개의 기독교인은 십자가에서 자기 구원을 생각합니다. 물론 십자가에는 우리의 구원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구원이 목적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목적이 구원이라면 신자가 십자가를 믿게 된 후로는 더 이상 의미 없는 십자가로 전락될 것입니다. 구원 받았으면서도 십자가만 바라보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여길 것이고 그럴듯한 행함이 있어야 구원 받은 신자다운 것으로 인식할 것입니다. 이것이 약속을 벗어난 성경 이해입니다.

 

 

고전 11:25절에 보면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라고 말합니다.

 

 

새 언약은 예수님의 피 위에 세워졌습니다. 십자가 위에 세워진 것이 새 언약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새 언약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언약을 모르면서 십자가를 믿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약 언약을 덮은 채로 십자가를 믿는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일하심은 사라지고 인간만 자리한 종교가 될 뿐입니다.

 

 

성경에서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언약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은 자기의 행함은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하심만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봄으로써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되고 그 하나님이 자신의 삶에 함께 하심을 깨닫는 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기에 언약에 집중하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본문 역시 언약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빼내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인도하여 그 땅을 주어 기업으로 삼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언약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말을 들은 이스라엘은 정작 모세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유는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가혹한 노역으로 말미암아”(9절)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납득이 안되는 것은 노역으로 고생하는 그들을 애굽에서 빼내어 노역으로부터 해방되게 하시겠다는 것이 언약의 내용인데 왜 가혹한 노역으로 인해서 모세의 말을 듣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가혹한 노역으로 고생한다면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빼내겠다는 말씀에 오히려 희망을 두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왜 마음이 상했을까요? 4장에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 백성들이 그 말을 믿으며 머리 숙여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자신들을 찾으시고 고난을 살피셨다함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모세의 말에서 자신들의 현재의 삶이 더 나아질 것을 기대한 것입니다. 그것이 모세가 자기들에게 온 이유이고 모세가 전한 말씀의 뜻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상황은 더 악화되었을 뿐입니다. 모세가 바로를 만난 일로 인해서 노역은 더 가중되고 이것이 이스라엘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입니다. 결국 모든 원망은 모세에게로 향하게 되고 모세에 대한 감정도 악화 되었을 것이기에 자연히 모세의 말이라면 듣지 않게 된 것입니다. 모세가 전한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모세 너의 말은 듣지 않겠다’는 마음이 앞섰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현재의 삶에서 이해하지 못한 것에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모세도 다르지 않습니다. “내가 바로에게 들어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한 후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출 5:23)는 모세의 원망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일하심을 현재의 삶에서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이스라엘과 동일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이스라엘이 모세를 원망하고 모세가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는 것은 현재의 생존 문제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현재의 생존 문제에서 확인되지 않을 때 원망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이 또한 지금의 기독교인들의 실상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문제에서 좀 더 근원적이고 실제적인 질문을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이 모세의 말을 듣지 않은 근원적인 이유가 현재의 생존 문제 때문이라면, 그들이 바로의 가혹한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어 문제가 해결되었다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말씀을 들었을까요?

 

 

가혹한 노동이 사라진 그 때는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 지속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게 되면, 또 다시 문제 해결을 기대할 것이고 해결되지 않으면 말씀을 듣고자하는 마음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음으로 마음이 상한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현재의 생존 문제에 붙들려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현재의 생존 문제에 대한 해결을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있는 근원적인 문제 해결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로 인한 죽음입니다.

 

 

모든 인간은 죽습니다. 그것이 죄의 값입니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죽음으로 끌어가는 죄 문제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해결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이기 때문에 언약 안에는 죽음이 없습니다. 이것으로 아담의 선악과 사건 이후로 인간이 해결하지 못했던 죄의 문제, 죽음의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죽음이 해결되었다는 것은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리는 혜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보다는 더 실제적인 혜택을 기대합니다. 지금 현재의 생존에 도움 되는 혜택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죄와 죽음의 해결지인 그리스도에 대한 말이 듣기 싫어지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현재의 생존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기쁨과 평강으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또 다른 문제가 부각되면서 여전히 불안과 염려에 붙들려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현재의 문제가 해결되고 잘되는 것이 믿음의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영원한 기업을 소망합니다. 영원한 기업이 하나님의 변치 않는 언약입니다. 그러므로 언약 앞에서 현재의 생존은 늘 쏜살같이 지나가는 것에 불과합니다. 현재의 삶이 부요하든 빈곤하든 지나가다가 잠시 후면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고 그 때에는 언약 안에 있는 자와 언약 밖에 있는 자로 구분될 것입니다. 신자는 이것을 보는 사람입니다.

 

 

8절을 보면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하셨다 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이스라엘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하신 땅으로 인도합니다. 이 언약은 어떤 경우에도 포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언약을 믿는 신자는 언약 안에서 불안과 염려를 떨쳐 버리고 평강이 있게 됩니다. 현재의 삶이 고통으로 펼쳐진다 해도 분명한 것은 언약 안에서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에 의해 인도 되고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창 17:8절에 보면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지나가는 현재에 필요한 것을 약속하지 않고 영원한 기업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현재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기업에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이 언약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었기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기업을 온전히 누리게 될 그 때를 기대하며 현재를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언약을 믿는 것이며, 이 믿음이 우리를 복음에 목마르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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