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03 17:56

(3강) 히브리 산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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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1:15-22http://onlycross.net/videos/exo/exo-011522.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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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5.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사람과 부아라 하는 사람에게 말하여

16.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17.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

18.애굽 왕이 산파를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같이 남자 아기들을 살렸느냐

19.산파가 바로에게 대답하되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하매

20.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

21.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

22.그러므로 바로가 그의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는 그를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하였더라

 

 

<설교>

이스라엘의 학대는 애굽에 요셉을 알지 못한 새 왕이 일어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요셉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요셉이란 인물 자체를 알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애굽에도 역사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비록 350년이 넘은 예전의 사건이라 해도 요셉에 대한 기록이 역사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 몇 백 년이 지나도록 함께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요셉이나 하나님을 모를 리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요셉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요셉으로 인해 지금의 애굽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렇게 보면 애굽 왕이 요셉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인간의 속성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 1:21)라고 말하는 것도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하지도 않는 것이 곧 인간의 속성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한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노력과 열심에 의해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자신이 열심히 살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처럼 모든 근거를 자신에게 두고 이해하기 때문에 은혜도 사랑도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조건적인 것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애굽 왕이 이스라엘이 강해지고 번성하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 괴롭히고 학대했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계속 번성하게 합니다. 그리고 애굽 왕은 또 다른 조치로 히브리 산파들을 불러다가 히브리 여인이 해산하는 것을 도울 때 남자가 태어나면 죽이고 여자가 태어나면 살리라고 명령합니다.

 

 

남자 아이를 죽이면 장차 이스라엘에서 남자가 사라질 것이고 따라서 여자만 남은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을 것이라고 계산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 산파가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립니다.

 

 

히브리 산파가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긴 것을 17절을 보면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고 말하고 21절에서는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경외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뻔한 성경 이야기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 산파가 애굽 왕보다 하나님을 더 경외하고 두려워함으로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길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세상보다 하나님을 더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신자가 됩시다.’라는 교훈적 이야기로 전개될 소지가 충분합니다.

 

 

지금의 기독교인들은 성경이 그러한 교훈적 이야기로 전개되는 것에 아주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교훈은 교훈으로 끝난다는 것에도 익숙해져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기 보다는 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지침을 듣는 것으로 만족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시 말씀을 들을 때는 기존에 들었던 교훈대로 살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감과 함께 역시 교훈을 들은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간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산파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애굽 왕의 명령이 두렵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두렵겠습니까? 우리가 산파와 같은 상황에 있다면 두려운 현실은 애굽 왕의 명령일 것입니다. 애굽 왕의 명령대로 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을 누구나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어온 우리의 삶에 경험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지키지 않아도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여러분의 경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을 때 하나님이 벌을 내리시고 심판하신 적이 있습니까? 만약 말씀을 지키지 않는 자를 하나님이 죽이셨다면 세상에는 누구도 살아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경험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은 말씀대로 살지 않아도 아무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상실된 채 믿음을 말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일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머리로는 하나님이 두려운 분이라고 말하는데 마음으로는 하나님보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큰 것입니다.

 

 

20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고 말합니다.

 

 

산파들은 자신들이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를 살리면 하나님이 자신들을 지켜줄것이고 복을 주실 것으로 믿었기 때문에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긴 것이 아닙니다. 산파들은 자신들에게 돌아올 이익을 계산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믿음에만 붙들려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산파들은 애굽 왕의 명령 위에 하나님이 계심을 믿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현재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수단이나 도구가 아닙니다. 믿음은 지금 주어진 상황이 어떤 것이든 그 상황 위에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모든 상황이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기에 죽든 살든 그 역시 하나님의 선한 뜻이 내게 이루어지는 것임을 믿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굳게 붙들려 있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이 믿음을 산파들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산파들이 애굽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 것은 하나님의 살아계심,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참된 현실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애굽 왕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복종되는 모습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래서 현실에 대한 계산이 있는 믿음은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주일 지키지 않으면 벌 받는 것은 아닌가?’‘십일조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물질에 손해보게 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계산과 함께 주일을 지키고 헌금을 하는 것들이 믿음과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현대 교회는 그것을 믿음으로 가르치고 그런 믿음을 요구하고 있음을 보면 참으로 심각한 현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산파들이 애굽왕의 명령을 어긴 일로 인해 죽임을 당했다면 후회하고 억울해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직 여호와가 누구신가만 생각했고 여호와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함에 의한 행동이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죽는다 해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음을 믿었을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억울함도 없는 것입니다.

 

 

21절에서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한 상으로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셨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산파들이 어떻게 되었다 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참된 현실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안다면 그것은 세상이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음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현실로 여기는 것이 참된 믿음의 시각입니다. 이러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우리가 두려워 할 것은 세상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애굽 왕의 명령은 하나님이 없이 육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자의 현실은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복종해야 하는 것은 세상의 요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잘된다는 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설사 세상으로 인해 손해를 본다 해도 달라지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그것으로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믿음을 주셔서 살아내게 하시는 우리의 삶이고 현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러한 믿음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계산이 없이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자신의 뜻대로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것만 믿고 의지하게 하십니다. 그러한 믿음으로 세상의 힘에 머리 숙이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만 생각하게 합니다. 이것이 이기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어떤 처지에서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죽는다 해도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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