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7.15 16:17

(34강) 여섯째 재앙

조회 수 1451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출 9:8-12http://onlycross.net/videos/exo/exo-090812.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8.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화덕의 재 두 움큼을 가지고 모세가 바로의 목전에서 하늘을 향하여 날리라

9.그 재가 애굽 온 땅의 티끌이 되어 애굽 온 땅의 사람과 짐승에게 붙어서 악성 종기가 생기리라

10.그들이 화덕의 재를 가지고 바로 앞에 서서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날리니 사람과 짐승에게 붙어 악성 종기가 생기고

11.요술사들도 악성 종기로 말미암아 모세 앞에 서지 못하니 악성 종기가 요술사들로부터 애굽 모든 사람에게 생겼음이라

12.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과 같더라

 

<설교>

본문은 여섯째 재앙에 대한 것입니다. 화덕의 재 두 움큼을 하늘에 날리면 그 재가 티끌이 되어서 애굽 온 땅의 사람과 짐승에게 붙어 악성 종지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섯째 재앙의 결과 역시 바로의 완악입니다.

 

 

이것을 12절에서 “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과 같더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왜 굳이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그냥 바로의 마음이 완악해서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더 이해하기에 좋지 않을까요? 바로의 마음이 본래 완악한 것도 사실이니까 그렇게 말한다 해도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는데 그 이유를 롬 9:18절의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는 말씀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신다면 그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완악하게 하셨다면 그는 하나님이 미워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자와 미워하는 자로 나누신 것은 사랑하는 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고자 하심이고 미워하는 자를 통해서는 하나님의 미움을 드러내고자 하심입니다.

 

 

이것을 신학자들은 선택과 유기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나누고 불합리하다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인간의 운명이 태어나기 전부터 선택과 유기로 나누어진다면 유기된 자는 구원의 기회조차 없이 멸망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러한 논리로만 생각하면 선택과 유기는 하나님의 불합리한 횡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인간에게만 초점을 두고 있는 또 하나의 완악함을 보여주는 것일 뿐입니다.

 

 

신학자들의 용어대로 말한다면 인간은 본래부터 버림받은 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미움의 대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유기된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자신을 버림받아 마땅한 자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들이 생각하는 지옥 갈 자는 하나님을 선택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초점을 둔 사람들의 구원관이고 지극히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사탄적 생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하 24:20절에 보면 “이에 하나님의 영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키시매 그가 백성 앞에 높이 서서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하지 못하게 하느냐 하셨나니 너희가 여호와를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 하나”고 말씀합니다.

 

 

스가랴가 이스라엘을 향해서 ‘너희가 여호와를 버렸기에 여호와도 너희를 버렸다’고 말하지만 이스라엘은 이 말을 전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스가랴를 죽여 버립니다. 이것으로 인간의 본심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의 악함을 인정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사랑 받고 구원될 자로 보여지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는 것에 의문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선한 바로를 악하게 하셨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애굽 사람이 볼 때 바로가 선한 왕이었을 수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선한 인간은 없습니다. 모두가 미움의 대상일 뿐이고 하나님의 버림 아래 있는 자들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버림 아래 있고 미움 아래 있음을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신 것으로 보이시는 것입니다.

 

 

11절을 보면 “요술사들도 악성 종기로 말미암아 모세 앞에 서지 못하니 악성 종기가 요술사들로부터 애굽 모든 사람에게 생겼음이라”고 말합니다.

 

 

요술사들은 아론처럼 지팡이가 뱀이 되게 했고 물을 피가 되게 하기도 했고 개구리가 땅에 올라오게 하는 능력도 보여줬습니다. 그런 그들이 악성 종기 앞에서는 무능력한 모습만 보입니다.

 

 

그런데 여러분께 요술사들과 같은 능력이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지팡이를 뱀이 되게 하고 물을 피가 되게 하고 개구리를 강에서 올라오게 해서 온 땅에 가득하게 하는 그런 능력이 있다면 스스로를 과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능력이 있다고 해서, 설령 그보다 더한 능력이 있다 해도 하나님의 심판을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여섯째 재앙이 요술사들로부터 생긴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기 신앙생활을 가치 있는 것으로 바라볼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증거로 여길 것이고 그것 때문에 복을 받고 구원을 받을 것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는 자를 완악하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바로의 마음만 완악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마음이 완악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신 것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 자체가 완악하다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신 이유입니다. 바로를 통해서 자신의 완악함을 봄으로 하고자 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 곧 구원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 비해 다를 것은 없습니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히브리 민족이라고는 하지만 현실의 고통에서는 하나님을 외면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런 그들은 하나님은 왜 구별하시는 것일까요? 여섯째 재앙 역시 애굽에만 해당되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은 하고자 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는 말씀에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재앙을 겪으면서도 모세의 말을 듣지 않고 이스라엘을 보내지 않는 바로의 완악함을 보면서 그 죄가 우리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음을 안다면 우리가 존재하는 모든 근거가 하나님의 긍휼에 있음을 믿게 됩니다. 우리를 이 믿음이 있는 자로 세우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입니다.

 

 

신앙은 버림받은 자들 속에서 건지시고 더러운 나를 예수의 피로 깨끗하게 하신 하나님의 긍휼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그리고 참된 신앙은 결코 자기의 힘으로 만들어 내는 것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 무엇도 구원의 능력이 되지 못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 하나님의 긍휼히 여겨주심만 감사하고 자랑할 뿐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참된 신앙인가를 알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면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자신의 구원을 자기 행함으로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여전히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고 십자가에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를 외면하는 것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신다고 해서 그 본심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바로를 긍휼히 여기신다면 바로의 마음에서 완악함이 사라지는 것일까요? 완악한 마음은 그대로입니다.

 

 

다만 다른 것은 자신의 완악함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완악한 존재이기에 자신의 악한 마음으로는 선을 행할 수 없고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믿을 수도 없음을 알게 되고 모든 것이 하나님이 긍휼히 여겨주신 결과임을 깨닫고 감사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된 증거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공로와 행위를 자랑할 수 없도록 만드십니다. 나에게도 선을 행할 힘이 있다고 생각할 때 세상의 완악함을 보게 하심으로써 나도 동일한 악한 존재임을 깨닫게 합니다. 죄를 죄 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뭘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잘하는 것은 수시로 완악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무엇을 실천해도 깨끗해 질 수 없기에 십자가라는 예수님의 실천을 믿을 뿐입니다. 이 믿음이 여러분께 있다면 그 증거는 여러분 자신의 모든 것을 부인하게 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이것이 성령이 함께 하는 신자입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성경본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설교 원고는 없습니다 신윤식 2022.01.01 950
공지 암, 옵, 욘 성경강해 방으로 옮겼습니다. 신윤식 2011.02.28 7277
공지 이전 홈페이지 수요일설교 들어가기 은석교회 2010.01.01 40134
260 (30강) 셋째 재앙 신윤식 2017.06.10 1696
259 (25강) 하나님의 군대 신윤식 2017.05.06 1694
258 (27강) 첫째 재앙 신윤식 2017.05.20 1689
257 (22강) 듣지 않음 신윤식 2017.04.15 1627
256 (23강) 입이 둔한 자 신윤식 2017.04.22 1622
255 출 35:1-3 (147강) 거룩한 날 신윤식 2020.09.19 1620
254 (32강) 바로의 타협 신윤식 2017.07.01 1613
253 (31강) 넷째 재앙 신윤식 2017.06.24 1609
252 (20강) 원망 신윤식 2017.04.01 1603
251 출 40:9-13 (152강) 거룩하게 하라 신윤식 2020.10.24 1587
250 (29강) 현실 모면 신윤식 2017.06.03 1572
249 (28강) 둘째 재앙 신윤식 2017.05.27 1566
» (34강) 여섯째 재앙 신윤식 2017.07.15 1451
247 (45강) 표적이 될지라 신윤식 2017.10.07 1445
246 (36강) 일곱째 재앙 신윤식 2017.08.05 1428
245 (44강) 여호와의 유월절 신윤식 2017.09.30 1415
244 (35강) 경고의 말씀 신윤식 2017.07.29 1400
243 (33강) 다섯째 재앙 신윤식 2017.07.08 1389
242 출 32:25-29 (133강) 헌신 신윤식 2020.05.23 1385
241 (40강) 여덟째 재앙 신윤식 2017.09.02 1385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15 Next
/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