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3.24 16:02

(64강) 알지 못한 양식

조회 수 818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출 16:13-20http://onlycross.net/videos/exo/exo-161320.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3.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14.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는지라

15.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16.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하셨느니라

17.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18.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19.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20.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설교>

인간은 자기 생존을 위해 살아갑니다. 가장 우선적인 일이 생존 문제로 되어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조차도 생존 문제가 해결된 다음의 일로 생각합니다. 때문에 생존에 문제가 발생하고 원인제공자가 있다고 생각되면 모든 원망이 그에게로 향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모세와 아론을 행한 이스라엘의 원망은 전혀 이상하지 않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자발적 의사에 의한 것이 아니라 모세와 아론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은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해 미리 알았다면 애굽에서 나오지 않으려고 했을지 모릅니다. 애굽에서보다 더 고생을 해야 한다면 사백년 동안 조상 대대로 살아온 애굽에서 나올 이유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생명이 아닌 생존을 우선으로 여기는 사람에게 당연한 것입니다. 항상 생명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선택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원망을 두고 우리가 할 말은 없습니다. 그들에게 있었던 원망이 우리에게서 매일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원망을 들으시고도 메추라기를 보내시고 만나를 주셔서 배부르게 하신 일입니다. 원망에 대해 징계하시는 것이 당연할 것 같은데 오히려 배부르게 하심으로써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는가를 아는 것에 중심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항상 우리가 최우선으로 여기는 생존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13,14절을 보면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는지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은 메추라기와 만나로 생존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단지 생존문제의 해결을 위해 메추라기와 만나를 주신 것일까요? 그런 것이라면 한 사람이 거둘 분량을 정할 이유는 없습니다. 분량을 정하지 않고 마음껏 거두어서 먹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16절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하셨느니라”는 말씀처럼 먹을 만큼만 거두라고 하시면서 한 사람에 한 오멜이라는 분량을 정하십니다.

 

 

그리고 18절에서는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고 말합니다.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 생각해 보면 세상의 이치와는 맞지 않습니다. 많이 거두면 그만큼 더 남아야 하고 적게 거두면 그만큼 부족한 것이 세상의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남보다 더 많이 거두고 많이 남기기 위해 피나는 경쟁을 합니다. 그리고 그 또한 생존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많이 거두어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두어도 부족함이 없다면 많이 거두었다 적게 거두었다는 것이 의미가 없게 됩니다. 많이 거둔 것이 부와 자랑이 되지 못하고 적게 거두었다 해도 비천과 불만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그들이 살았던 기존의 세상, 애굽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메추라기와 만나를 주신 하나님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생존을 위해 한 일이 또 있습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19,20절)는 말씀처럼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라는 말씀을 어기고 더러는 아침까지 둔 것입니다.

 

 

날마다 아침이면 지면에 만나가 있을 것인데 왜 남겨두었을까요? 그것은 내일에 대한 불안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 수 없습니다. 오늘 있는 만나가 내일은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있는 만나가 내일은 없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장 내일에 대한 불안감이 있게 됩니다. 만나가 없으면 당장 생존에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일을 알 수 없는 불안한 생존을 위해 아침까지 남겨둔 것이라면 결국 이스라엘은 만나를 생존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으로만 여겼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스라엘이 이러한 성향의 인간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가나안 땅은 기존에 존재하던 가나안 민족의 삶의 방식 그대로 유지될 것입니다. 많이 거두기 위해 경쟁할 것이고, 많이 거둔 것이 힘이 되면서 상대적으로 적게 거둔 사람은 힘없는 약자가 되는 세상의 속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애굽의 삶의 방식이 아닌 새로운 방식을 가르치고자 하십니다. 그것이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는 균등입니다. 이러한 균등으로 나타나는 세계는 인간의 힘으로 거둔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이며 인간은 그 은혜조차 받을 수 없는 존재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망을 들으시고 메추라기와 만나를 주시는 이유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메추라기와 만나는 이스라엘의 열심과는 무관합니다. 이스라엘이 원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지면에 있었던 것이고 그것을 거두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 오멜씩 거두면서 자신들의 노력과는 무관한 은혜임을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알지 못한 양식을 주신 이유입니다.

 

 

그런데 고후 8:14-15절을 보면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헌금의 문제로 연결하여 말합니다. 헌금을 단순히 교회에 돈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많이 거두었든 적게 거두었든 그것이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담긴 것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또한 세상의 이치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시각, 새로운 세계입니다.

 

 

세상은 많이 거둔 자를 적게 거둔 자보다 더 가치 있게 대우합니다. 실력이 있기에 많이 거두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많이 거둔 자는 많이 헌금할 수 있습니다. 적게 거둔 자는 상대적으로 적게 헌금하게 됩니다.

 

 

그런데 교회가 헌금을 많고 적음의 시각으로 본다면 어떻게 될까요? 교회에서 균등은 사라지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로 거두었다는 것 또한 무시되면서 많이 헌금한 사람이 대접받는 지옥의 현장이 될 뿐입니다. 많이 거둔 것이 자랑이 될 수 없고 적게 거둔 것이 불만이 될 수 없는 균등의 세계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균등의 세계는 소유가 균등하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소유가 균등해 질 수는 없습니다. 균등은 십자가로 가능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죽은 자임을 안다면 그리스도의 피를 가장 존귀한 생명으로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가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얻은 자라면 세상에서 거두는 것의 많고 적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균등입니다.

 

 

소유의 많고 적음의 차등이 없고 따라서 헌금 액수의 많고 적음에 따른 차등도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정의로 인한 균등이며 성령으로 새롭게 된 신자의 세계인 것입니다. 생명을 얻었고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하게 된 것이야 말로 참된 부요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땅의 것의 많고 적음은 그야말로 의미 없는 것으로 추락해 버린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내일을 불안 해 하면서 거둔 것을 아침까지 둡니다. 하루하루를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믿지 못하고 내가 거둔 것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게 하신 하나님이 내일을 살게 하신다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오늘도 내일도 많이 거둘 것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활의 생명에 참여한 신자는 천하를 얻은 것보다 귀한 것을 가진 부요한 자입니다. 그래서 오늘 많이 거두어도 남은 것이 없고 적게 거두어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만 귀할 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영광을 소망하며 균등의 세계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성경본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설교 원고는 없습니다 신윤식 2022.01.01 950
공지 암, 옵, 욘 성경강해 방으로 옮겼습니다. 신윤식 2011.02.28 7276
공지 이전 홈페이지 수요일설교 들어가기 은석교회 2010.01.01 40110
160 아 1:5-8 (3강) 어여쁜 자 신윤식 2021.03.20 611
159 아 1:3 (2강) 사랑하는 이유 신윤식 2021.03.13 640
158 아 1:1-4 (1강) 솔로몬의 아가 신윤식 2021.03.06 903
157 출 40:17-21 (153강) 성막을 세우니라 신윤식 2020.12.31 625
156 출 40:9-13 (152강) 거룩하게 하라 신윤식 2020.10.24 1587
155 출 39:42-43 (151강) 명령하신 대로 1 신윤식 2020.10.17 1158
154 출 36:8-13 (150강) 성막을 만들다 신윤식 2020.10.10 28231
153 출 35:30-36:1 (149강) 지혜로운 자 신윤식 2020.10.03 795
152 출 35:20-29 (148강) 자원하여 드린 예물 신윤식 2020.09.26 708
151 출 35:1-3 (147강) 거룩한 날 신윤식 2020.09.19 1619
150 출 34:29-35 (146강) 얼굴의 광채 신윤식 2020.09.05 795
149 출 34:27-28 (145강) 여호와와 함께 신윤식 2020.08.29 641
148 출 34:25-28 (144강) 새끼와 어미 신윤식 2020.08.08 972
147 출 34:21-24 (143강) 쉴지니 신윤식 2020.08.01 594
146 출 34:18-20 (142강) 무교절의 의미 신윤식 2020.07.25 12488
145 출 34:11-17 (141강) 질투의 하나님 신윤식 2020.07.18 706
144 출 34:10 (140강) 언약을 세우나니 신윤식 2020.07.11 514
143 출 34:1-9 (139강) 다시 만든 돌판 신윤식 2020.07.04 5162
142 출 33:17-23 (138강) 내가 하리니 신윤식 2020.06.27 15850
141 출 33:12-16 (137강) 무엇으로 알리이까 신윤식 2020.06.20 793
Board Pagination Prev 1 ... 3 4 5 6 7 8 9 10 11 12 ... 15 Next
/ 15